Page 61 - 월간 축산보림 2025년 3월호 (Vol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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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청서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모르는 에
블린, 이야기 좀 하자는 조이의 말을 틀어
막는 에블린, 세탁소 구석구석에 설치된
CCTV 너머로 이상하리만치 빠르게 움직
이는 웨이먼드의 변화도 알아채지 못하는
에블린. 에블린은 눈에 비쳐도 인지하지
않고, 보라고 내밀어도 주목하지 않고, 관
심 좀 가지라고 신호를 줘 봐도 깨우치지
않는다. 각성이 없으면 망할 텐데. 마침내
웨이먼드가 나선다. 국세청 엘리베이터
안, 갑자기 양산을 펼쳐 CCTV를 가린다.
로 웨이먼드는 아주 침착하다. 그 까닭은
에블린의 귀에 이어폰을 끼우고, 스마트
웨이먼드가 이미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
폰 어플리케이션을 켜고, 이혼 신청서 뒷
다. 그러던 웨이먼드가 갑작스레 기행을
면에 뭔가를 적어 보여 준다. 그러자 에블
일삼더니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
린의 세상이 휙휙 바뀐다. 다른 색경으로
으로 가서 조사관을 만나든지, 오른쪽으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로 가서 청소 도구실로 들어가”든지 선택
이때부터 웨이먼드는 다른 존재가 된다.
하라고 말한다. 웨이먼드가 제시한 ‘왼쪽
사실 그는 에블린의 각성을 이끌기 위해
이냐, 오른쪽이냐’ 하는 문제는 그가 선각
이혼 신청서를 준비한 것이다. 수행할 때
자로서 에블린에게 던진 화두다. 화두는
죽비로 어깨를 내리치는 것은 사람을 때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의문을 일으켜
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두를 놓친 중생
그 해답을 구하도록 하는 것, 말보다 앞서
의 흐트러진 심신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스스로 마음을 다잡도록 하는 실마리다.
이렇듯 웨이먼드는 에블린과 갈라서기 위
여기서부터 에블린은 현실을 벗어나 기이
해서가 아니라, 에블린이 자신의 색경을
한 세계, 다중적 ‘회・빙・환’의 세계로
제대로 보고 넘어서게끔 하기 위해 이혼
빠져든다.
신청서를 들고 이 여정에 함께한 것이다.
웨이먼드는 『에에올』의 세계관, 멀티버스
그러니 웨이먼드는 에블린을 이끌기 위한
의 첫 번째 관문을 열어 준다. 에블린은
선각자 또는 아라한일 것이다. 일상에서
웨이먼드의 도움으로 삶의 중요한 분기점
벌어지는 모든 문제 앞에서 초조하고 신
들로 회귀하고, 배우 양자경의 영화적 순
경질적이며 화나 있는 에블린과 대조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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