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 - 월간 통도 2021년 1월호 (Vol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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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TONGDO                                     무풍한송




              님이었다는 증거가 되지요.”

                스님께서 이렇듯 이동인 스님과 통도사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려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개화의 분위기가 사찰(통도사)에서부터 일기 시작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동인

              스님에 대한 기록은 「삼소굴 일지」에도 편지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분명히 통도사 스님
              이었음은 명확하다.

                한 분의 스님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님은 뒤이어 환성 스님 이야기

              도 전하셨다. “이동인 스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는 아마 환성 스님의 일이
              반면교사가 됐기 때문일 겁니다. 환성 스님이 통도사 백련암에 계셨다가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셨는데, 그때 제주도에 유배 가신 지 일주일 만에 열반하셨습니다. 사대부들의 무

              서운 눈초리 속에 비문 하나 쓸 수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있었습니다. 아마 이동인
              스님 역시 훌륭한 족적을 남겼음에도 자료나 흔적을 제대로 모실 수 없었던 분위기였던

              것 같습니다. 애석한 일이지요.” 환성지안 스님은 걸출한 제자들을 배출하여 조선 후기 불

              교를 이끌었지만, 오랫동안 역사 속에 자취가 감춰졌다가 근대에 통도사에서 환성지안
              스님을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통해 진면목을 밝혀낸 바 있다.



                근대 통도사 개화의 상징이라 하면 구하 스님이 대표적이다. 한일병합 이후 초대 주지

              를 역임하셨던 스님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독립자금을 지원하며 조국의 독립운동에 앞

              장섰던 인물이다. “구하 스님은 일반적인 생각을 넘어선 분이셨습니다. 당시에는 개화開
              化라는 표현을 쓰지 않아서 그랬지, 완전한 개화승이었습니다. 호롱불을 켜고 살던 시대

              에 울산에서 단독 전기를 끌어와 통도사에 넣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쌀이면
              최고이던 시절에 논 80마지기를 팔아서 용단을 내리신 분이 구하 스님입니다. 그렇게 넣

              은 전기로 밝힌 불로 원통방에서 통도중학교를 개원하게 되었습니다. 승려도 공부를 해

              야 한다, 민중을 공부시켜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 반영된 것입니다. 논을 팔아
              전기를 끌어온다는 것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반대에 부딪혔겠습니까? 하지만 개화에 대

              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결단을 내리셨던 겁니다.”



                 승려도 공부를 해야 한다,

                 민중을 공부시켜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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