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성(부산 금강사, 뉴욕 백림사 주지)스님의 행자시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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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374회 작성일 17-04-05 09:41본문
| 나의 행자시절 이야기_혜성 스님 |
난, 원래 해인사 중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통도사로 건너왔는지… 물론 지어놓은 인연 탓이었을 것이다. 나의 행자생활은 불국사에서였다. 은사스님인 일붕 스님이 당시 석굴암 주지를 하고 계셨는데 그런 인연으로 불국사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어찌어찌하여 범어사로, 그리고 다시 통도사로 이적을 했다.
그리고 난 석굴암에도 잠시 있었는데, 바로 은사스님의 인연이었던 까닭이다.
열 일곱 살 그 시절, 철 없던 시절 뭘 알았을까.
얼굴에는 여드름이 가득하고, 옷도 빨아 입지 못하고 꼬질꼬질한 모습의 십대 중, 후반 도반 들이었으니 지금 생각해 봐도 정말로 철 없는 어린 아이이지 않았겠는가.
범어사 행자시절, 관조스님은 나보다 두 해 선배였다. 관조스님은 아랫반인 나에게 그런 말을 종종했다. “야, 임마! 옷 좀 빨아 입고 다녀 라” 할 정도로 깔끔하지 못했으니 윗반 스님이볼 때 오죽 지저분해 보이면 그런 말을 했을 까.
그리고 당시에는 모두 행건을 차고 살았다. 그러나 다들 행건을 차는 것이 어려워 잘 차지도 못했고 법복은 광목으로 만들어져 자주 세탁을 하지 못하고 입고 다니면 그것이 반질반질 하게 닳고 닳아 해지는 것이 다반사였다.

이야기를 되돌려 해인사 행자시절의 기억은 참 아름답다. 철 모르던 어린 도반들은 그곳이 절간임을채 인식하지도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았고 드넓은 도량을 뛰고 달리는 일이 잦았다. 심지어는 구광루 앞대적광전 앞에서 쫓아다니고 소리를 지르고 달리고 하는 일이 다반사였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뭐라고 하는 어른스님들은 안계셨다. 돌이켜보건대, 어른 스님들은 동자승들을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 셨나 싶다.
그러나, 언제 뭐라고 꾸짖냐 하면, 장경각 지키는 일을 게을리 하면 쫓겨났다. 그것을 야경이라고 하는데 그 장경각을 도는 소리가 나지 않으면 쫓겨날 정도로 혼이 났다.
한번은 도반이 야경을 돌다 그곳에서 잠이 들었다. 어른스님이 화들짝 놀라 깨웠으나, 잠이 깊어 일어 나질 않는 거였다. 그리하여 아침에 대중공사를 붙이는 일이 있었다. 결국 도반은 나를 대동해 참회하러 다니고 어른스님들께 매달리기까지 하였으나 그 용서는 쉽사리 내려지지 않아, 어른스님들 앞에서 날마다 참회를 해야만 했다. 마침내 용서를 받게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장경각은 해인사에서 최고로 소중한 전각이며 불사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공양을 가져가 법당에 올리는 소임을 맡았다.
당시 장경각에는 노전스님이 있었고 그 노전스님에게는 아주 큰 임무가 부여됐다. 노전 법당 문을 유리로 해 놓았는데 그것은 촛불이 제대로 꺼져 있는지를 세 번씩 확인하라는 의미에서였다. 목조건물인 탓에 혹시나 있을 화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다.
마치고 확인하고, 돌아서서 확인하고, 문 닫고 한 번 더 보라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야경과 촛불 소등, 그것만 잘 하면 혼나는 일이 없었다.
그때는 해인사에 기룡스님, 영암스님, 자운스님, 성철스님 등이 계셨던 때였다. 그 시기가 바로 해인사가 총림을 하고자 하던 시기였으며 난 그 때쯤 통도사로 건너와 경봉스님 시봉을 했다. 그 즈음, 벽안스 님은 통도사 주지를 하고 계셨다. 벽안스님은 외모로 뵐 때, 아주 찬바람이 불 정도로 날카로운 모습의 스님이셨다.
당시 지금 서울에 살고 있는 자우스님(현, 서울 금강사 주지)과 난 통도사 강원에 들어가기 위해 은사스님 추천서를 제출해야 했는데, 우린 서로의 추천서를 각각 써주기로 하고 자우스님 것은 내가 써서 은사 경산스님이라고 쓰고 내것은 자우스님이 써서 ‘벽암스님’이라고 써서 도장까지 파서 찍고 제출을 한것이다.

그런데 보통 하루 이틀이면 통과하는 추천서이건만, 객실에서 1주일을 기다려도 부르지 않는 것이었 다. 그리고 1주일 뒤, 종무소에 불려가 앉았는데, 주지 벽안스님이 말씀하시길, “ 야, 이놈들아, 너희들 해인사에서 도망 왔지! 너희들 추천서 누가 썼냐!”라고 호통을 치시더니 “ 내 이름은 ‘벽암’이 아니라 ‘벽안’이다. 이놈들아.” 라며 혼쭐을 냈다.
그러나 강주를 지내신 홍법스님이 우리를 부르시더니, “ 너희들 추천서 통과했으니 강원 공부를 하면 된다.” 라며 우리를 맞아주시는 거였다.
그때 도반들 중에는 지금 설법 잘 하기로 유명한 종범스님이 있었고 우리들의 은사는 홍법스님이었고, 덕민스님이셨다.
“종범이는 글 물미가 났다.” 하시며 칭찬을 하던 기억이 또렷하다. 사집반에서 경을 볼 때도 종범스님은 그렇게도 말 조리가 있었다. 종범스님은 출가 전에 한문을 아주 많이 익히고 온 상태였다. 그때 벽안 스님은 그렇게도 종범스님을 아끼셨고 그리하여 벽안스님 밑으로 입실을 한 것이다.
벽안 스님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다. 강원 수료를 앞두고 다툼이 있었다. 나와 함께 공부하던 도반 스님이 밤에 다른 스님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다음 날 아침, 대중 공사 때 이 사실을 고하자 벽안 스님은 구타를 한 당신의 상좌를 당장 내친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강원 수료식이 있었고, 그 날 인사를 드리러 갔던 자리에서 벽안 스님은 검은 뿔테 안경을 벗으시고는 돌아 앉으셔 눈물을 흘리셨다. 그 일이 없었다면 함께 수료를 했을 당신의 상좌를 떠올리셨던 것이다. 늘 추상같은 모습을 보이셨던 벽안 스님의 제자를 그리는 애틋한 마음에 나와 도반은 숙연해졌다.
옛날 강원에서 만났던 도반들은 지금도 모임을 하고 있다. 해인사 출신 스님들의 특징이 모임에 적극 적이라는 사실이다. 가야산회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설정스님, 무비스님 등이 우리 가야산회의 일원 들이다.
내 나이 이제 칠순에 이르렀고 한국 보다는 미국에서 수행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게 사실이다.
3~40년을 미국 동부에 정착해 대단위 불사를 일으켰으며 그 불사의 결과물은 올해와 내년으로 나뉘어 한국에도 적극적으로 알릴 계획이다.
그리고 뉴욕 백림사 인근의 교회를 매입하여 오는 부처님오신날에는 잔금을 치르고 법회를 봐야 한다.
은사의 모습을 닮았는지, 내 본래 모습은 부처님의 본래 모습을 자꾸 닮아가는 느낌이며 해외포교의 이력 또한 은사 일붕스님의 영향이 지대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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