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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한 생 머물다 갈 따름납자의 길 들었으니(영축산 문수원 수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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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845회 작성일 17-03-0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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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행자시절 이야기 |

 

나는 비구다. 극락암 조사각에서 평생 비구로 살다 가겠노라서원했었다. 비구이기 전에 수행자이다.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육신 이전의 나를 참구하는 수행자다. 편리에 따라 껍데 기에 붙여 이르는 단계적 호칭들은 그저 이름 이다. 행자일 때나 사미 · 비구일 때나, 선화가일 때나 시인일 때나 오직 하나, 화두다.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진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날 오후, 나는 어른과 아이들이 어우러져 왁자지껄한 풍경을 뒤로 하고, 한쪽 모래밭에서 탑을 쌓았다. 정성을 다해 쌓은 모래탑이 물살에 무너지면 다시 쌓기를 여러 번,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온 세상이 적막강산에 빠진 것 같았다. 모두 떠나고 남은 것은 모닥불이 타다 남은 재와, 그 곁의 자갈과 모래, 그리고 흐르는 강물뿐이 었다. 나는 오랫동안 적막한 강가에서 노을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 수안 스님 |

내가 열 살 때 전쟁이 일어났다. 6·25 전쟁을 거치는 동안 형편은 굉장히 어려워졌고 아버지가 돌아가신뒤 모든 재산이 차압당해 나는 이모네의 신세를 져야 했다.

 

이모네 이웃집은 목공소였다. 어느 날 그 집의 목수 아저씨를 따라 해인사에 가게 됐고, 거기에서 인곡 스님을 만났다. 그날이 처음으로 절에 간 날이었다. 스님께 절을 하니 스님은 벽에 붙은 그림에도 절하 라고 하셨다. 올려다보니 배를 턱 내밀고 웃고 있는 두 남자(한산습득도)와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앉은 달마대사 그림이 있었다. 순간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큰스님 앞에서 절을 하다 웃었으니 혼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런데 혼나기는커녕 인곡 스님은 내게 과자와 홍시를 건네주며 내일 또 오너라하고 말씀하셨다. 이튿날 친구들을 여럿 데리고 스님을 찾아갔다. 그때 스님은 마치 이솝우화 같은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6근과 6식을 설명해주신 거였다.

 

이후에도 인곡 스님을 찾아갔다. 스님은 아함방등경’, ‘예경’, ‘초발심자경문’, ‘미타삼부경등을 옛날 이야기 하듯 우리의 언어로 설명해주곤 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불교물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도인이 뭔지 불법이 뭔지도 몰랐던 나는 그때부터 불교와 절에 매료되어 절에서 먹고 자고 스님들의 심부름도 하며 지내게 되었다.

 

당시 진주에는 어린이 법회와 청년회가 매주 일요일 새벽 시내를 다니며 도량석을 했는데, 내가 목탁을 들고 앞장서 걸었던 기억이다. 이는 인곡 스님의 상좌인 운문 스님이 어린이 포교를 하기 위해 시작한 것으로, 운문 스님은 해방 이후 어린이 법회를 제일 먼저 개설한 어른이었다. 그 곁에서 명함없는 어린이법회 지도 법사를 하며 스님께 들은 법문을 모아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역할도 도맡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설봉 스님의 법문을 듣던 도중 문득 참선 수행을 해야 한다는 인연이 찾아들었고, 그날 이후 줄곧 화두 참선에 매진해 왔다.

 

그리고 내 나이 열일곱에 세상 말로 입산 출가를 하게 되는데, 내게는 출가 전과 후가 크게 다르지 않는 생활이 물 흐르듯 흘러가는 것뿐이었다. 어찌되었든 출가를 하여 산과 절에 깃들어 사는 행자의 삶이 시작됐다. 도 예비승도 속 도 아닌 중간 지점에서 행자 비슷한 시간을 보낸 세월까지 보탠다면난 꽤 오랜 행자 생활을 거친 셈이다.

난 꽤나 괴짜였다. 공부를 하다가도 불현 듯 국수를 삶아 갖다 두고 공부중인 대중들을 불러내 한 술 뜨게 하기도 했고, 법회 중에 기운이 없고 졸려하는 사람들이 보이면 이것저것 약초를 한 솥에 넣고 탕을 끓여 나누어 주곤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도 옛 이야기를 하다보면 회자되는 것이 수안이 음식을 잘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요리를 하는 지 배운 적은 없었지만, 호기심이 많아 어느 것도 이리 저리 뜯어보고 살펴보며 궁리하는 성품인지라, 한 음식을 맛보아도 다음을 생각하곤 했었다.

 

하루는 석정 스님과 일타 스님을 모시고 두 분 스님의 도반 스님이 주석하던 절에 가게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스님들 몰래 국수를 사서 몰래 걸망에 넣어 뒤를 따랐다. 가는 길에 눈에 보이는 제피 잎도 몇 개 따서 주머니에 챙겼다.

그런데 절에는 아무도 없었고, 어른스님들을 모신 처지라 공양은 해결해야 했기에 살림을 살피니, 쌀독에 쌀만 있을 뿐 된장독은 말라 있고 반찬 하나 없는 게 아닌가.

 

생각 끝에 우선 물을 끓여 마른 된장독에 넣어 말라붙은 된장을 우려냈다. 거기에 제피와 소금을 넣어 간을 하고 그 물에 국수를 삶아 급히 한 상을 차려냈다. 두 어른은 연신 맛있다고 칭찬을 하며 남김없이다 드셨다.

 

그저 해본 것이었다. 밖에서 맛 본 것을 궁리하고 생각하고 필요에 따라 응용을 한 것이다. 글도 그렇 고, 그림 또한 그렇다. 내 삶이 그런 모습이다.

 

내겐 졸업장 하나 없다. 절에서도 참선만 했고 강원도 다니지 않았다. 향곡, 일타, 경봉, 석정, 인곡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을 지척에서 모시며 살았지만, 스승이라 하면 돌 하나, 나무 하나, 바람소리까지도다 스승이다. 사방천지가 불법이요, 만물이 불법 문중의 일불제자이고 스승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출가승이 되었고 10, 20, 30, 조주선사의 무 자 화두를 들고 조주는 왜 라 했는가묻고 또 물었다. 언젠가 부턴 빈 종이가 보이면 그곳에 틈틈이 를 그려 넣었다.

 

난 지금도 종이 위에 자를 그린다. 위에 를 쌓아 탑을 세운다. 그럴 때면 진주 남강에서의 적막 했던 저녁이 떠오른다. 그 저녁의 황혼과 흐르는 강물과 무너져 내린 모래탑이 눈앞에 선하다. 내게 있어 는 이렇듯 번잡하고도 철저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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