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라면 어디든 좋아..기왕이면 청정비구승으로 살고 싶어라(시드니 정법사_회주 무구 기후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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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723회 작성일 17-02-10 11:36본문

6년 묵언정진의 수좌, 호주 시드니 정법사를 창건한 승려 등 현재의 나를 지칭하는 수식어는 그러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더 극명하게 드러 내는 말은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얽은 승려로 더 널리 기억되고 있을 터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더 넓고 깊은 선지가 발달 해서였을까.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1965년 가을 추석 전, 나는 새벽 무렵 도망쳐 나오듯 출가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몰래 집을 나섰다. 그러나 절에 가기는 가야했으나 절에 대한 사전 지식이나 정보가 전무했던 까닭에 국민(초 등)학교 소풍 때 가을 소풍 가서 하룻밤 자고 왔던 봉정사만 떠오를 뿐이었다.
그리하여 봉정사에 도착하여 출가의 뜻을 밝히니, “ 젊은 사람이 공부를 제대로 하려 거든 동래 범어사나 양산 통도사 같은 큰 절에 가시오” 라고 일러주어 그 길로 긴 장화를 신고 콩밭과 솔밭 그리고 강구초등(국민)학교 교실 등에서 자면서 일주일이 걸려 범어사에 도착했다.
범어사는 부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생전 처음 바다구경을 하고 영도다리를 보고 용두산공원에 올라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며 바다와 부산 시내를 내려다보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기억이 있는 곳이었다.
당시 전교생은 동래의 삼우관이라는 여관에서 묵었는데 사람들이 이튿날 모두 범어사를 올라간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방을 지킨다며 절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그때 들은 ‘범어사’라는 딱 한 마디가 인연이 되어 발길이 범어사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니 한톨의 종자나 한 마디의 말이 결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 우주법계의 이치란 실로 놀라움이 아닐 수 없다.
일주일 동안 난 안동을 출발하여 강구, 영덕, 포항을 거쳐 그렇게 부산 범어사에 도착을 했고 어산교를 지날 무렵, 저녁예불 시간인 듯 금정산은 범종소리에 고요히 둘러싸여 실로 장중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종무소에 가서 “불경을 연구하러 왔다”며 승려가 되러 왔다는 표현을 제법 유식한 척 하며 건네니, 신분증을 제시하라고는 아래 위를 훑어보더니 암자에라도 가겠느냐고 했다.
그랬다. ‘절이면 어디든 좋다’는 그 생각 뿐이었고 그렇게 해서 찾아 올라간 곳이 금강암이었다. 그곳에는 공양주가 없었고 암주이신 주지스님은 얼굴이 해맑았고 고개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우신 모습으로 간헐적으로 코를 훌쩍거리는 키가 작은 분이셨다. 그는 내 이름과 고향을 물은 후, 절에 처음 오면 행자 라고 부르며 밥부터 지어야 하는데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자취를 오래했다.”고 하니, “잘 해보라”며 행자생활을 수락하셨다. 그날 이후 근 2 년을 그곳에서 공양주 노릇을 했다. 그러나 처음 먹은 맘은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몇 번을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주지스님은 한 마디의 나무람이나, 왜 갔느냐는 말씀조차 하지 않으셨다. 평소 깔끔한 성품이기도 했고 또 행자가 필요한 절이기도 했겠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스님은 인연의 원리를 그대로 수용하고 체화하는 훌륭한 수행자인 분이 분명했다. 내 비록 그 스님의 상좌는 되지 않았지만 수계 후, 인사도 드릴 겸 금강암을 자주 찾았고 이후에도 해제 때면 반드시 한번씩 들리곤 하는 마음의 고향 같은 절이 금강암이었다.
범어사 금강암은 그렇게 내 행자생활의 출발지였다. 그러나 난 2년 여의 금강암 공양주 노릇을 하다가 득달 같이 통도사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일어 대중들이 아침공양을 하고 있을 때, 큰 솥 등 자잘한 것들 까지 모두 설거지를 해놓고 방을 나섰다.
“ 주지스님, 인연이 다 되어 이곳을 떠납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공양주 행자 드림” 이라는 작은 쪽지를 봉투에 넣어 주지스님 방 앞마루에 작은 돌로 눌러 두고는 금강암을 나섰다. 남 몰래 도망가는 짜릿 함과 없어진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설왕설래를 상상하면서 산문을 나서는 재미는 운수납자의 또 다른 재미다.
광목 두루마기에 풀을 많이 하여 사그락 소리가 날 정도의 뻣뻣한 옷을 입고 나선 범어사의 일주문, 설렘과 불안감 두 마음을 안고 양산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걸어서 통도사에 도착했으나 결제중 이라는 생각은 저만치 떼어두고 왔던지라, 주지스님의 “행자가 건방지게 함부로 돌아다닌다”는 야단을 맞고서야 종무소에서 소개해 준 자장암으로 올랐다.
자장암의 대문에 들어서니 커다란 보리수나무의 그늘이 평상 위에 가득했고 우람한 체격의 주지 같은 모습의 스님이 앉아 있었다. 나는 큰절 종무소에서 받아온 쪽지를 내밀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나니 하는 말이 “ 나도 행자입니다.” 하는 것이었다.
“ 암주스님은 어느 날 두툼한 편지를 받고 난 다음, 산에 가서 눈이 퉁퉁 부울 정도로 울고 내려오더니 잠시 다녀온다고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었는데 여전히 소식이 없습니다.” 면서 임시로 이 절을 지키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윽고 저녁예불에 함께 참석했는데 그는 염불도 시원찮았고 음성도 신통치 않았다. 절밥을 먹은 지 2년이나 된 나는 천수경은 물론 불공과 제사의식까지 할 수 있는 정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초성도 상당해서 금강암에서 100일 염불기도까지 한 베테랑행자였다. 이런 자신감이 들자 내심 교만한 마음 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 내가 대리 주지 행세를 하는 형편이 되었고 통도사에 오길 매우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금개구리가 나온다는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많이 방문하는 자장암은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 운제사의 문수보살 앞에서 기도를 드린 후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얻어 모시고 귀국하여 통도사 터에 와 절을 세우려 하니, 연못에 살고 있던 용 아홉 마리가 절을 짓는데 결사 항전해서 하는 수없이 이곳 자장암터에서 작은 움막을 짓고 수행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니 자장암은 통도사 본절 보다 먼저 세워진 암자로 지금도 참배객들이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 곳이다.
지금 생각하니 50여 년 전의 기억이 새로운 지금이다. 무더웠던 그해 여름, 종무소에 들르기 전, 적멸보 궁에서 정성껏 7배의 예를 올리고 ‘어떻게든 이곳에서 잘 살 수 있게 되기를 ’ 이라는 발원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던 그 기억. 호왕목 나무가 드리워진 그늘 아래 앉았는데 글 읽는 소리가 어찌나 낭랑하게 흘러나오든지… 감로당에서는 독경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고 뒤쪽 굴뚝에선 검은 연기가 대웅전 쪽으로 휘감겨 돌아 나오고 있었다.
그때 부엌에서 크게 글 읽는 소리가 새어 나왔는데, 강원에 들어가서 보니 치문의 구절이었다.
‘고통 세계 못 벗어나 부모 유전 이어받아 사대로 지탱하다 늙고 병듦 시시각
내 맘대로 안되다가 아침나절 잘 지내다 저녁 때에 사라지니 순식간에 다른 세상 업만지고 가게 되네’
한 스님이 부엌문을 열어놓고 부지깽이로 땅을 치면서 계속 암송해 갔다. 그러면서 내 쪽을 바라보면서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옷 입은 매무새로 보아 행자가 틀림없어 보였을 테고, 어쩌면 자기 후배로 들어오길 기대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축산 통도사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금강암 암주스님이 대처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도망쳐 나온 나에게 청정비구로서의 당당한 행보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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