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웠던 1959년(극락호국선원 선원장 고원 명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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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367회 작성일 17-01-09 14:48본문

6.25가 끝나고 그리 오래지 않은 때, 내 나이 열 일곱이었다. 김포에서 나고 자란 나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과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자랐다.
농번기에는 부모님의 일을 거들어드리는 때가 있었고, 여느 때는 물가로 나가 고기를 잡는 일도 허다했다.
그런 유년시절, 아버지는 내게 가장 크고 가장 힘이 센 어른이라는 생각이었다.
황소 뿔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흔들 정도의 힘을 자랑하셨으니 아버지의 힘은 오리 밖까지 소문이 나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아버지는 키가 팔척 장신이셨고 그에 비해 어머니는 자그마한 체구에 지고지순한 타입이셨다.
난 어린시절부터 한학에 관심이 많았다. 누나들 사이에서 컸지만 마음만 큼은 누나들을 앞서나가고 싶을 정도로 내면의 자신감이 넘쳐났고 반면 사람들과의 관계는 묵묵하다 할 정도의 과묵한 성품이었다.
그러나 내면에서의 더 큰 무엇이 나를 붙들고 있었던지, 난 출가 결심을 하고 해인사로 향했다.
그것이 1959년 겨울이었다. 해인사 골짜기의 바람은 예사 추위를 동반하는 것이 아니었고 당시 해인사에 사는 대중은 3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런 대중살림 속에서 난 행자생활을 했고 고무장갑도 끼지 않고 엄동설한 공양간 일을 해야 하는 상황과 엎드리면 허리까지 독에 묻힐 듯한 깊은 김칫독의 김치를 꺼내야 하는 힘들었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보통의 인내심으로는 힘들었을 일이었다.
지금처럼 고무장갑이라도 있다면 좋았으련만, 고무장갑도 없이 김치를 꺼내는 어린 행자의 삶은 수행자로의 관문에 있어 호된 시집살이가 분명했다.
그런가하면 선방의 대중공양을 준비하는 날에는 귀하디 귀한 만두가 그렇게도 먹음직스러워보일 수가 없었으며 김, 감자튀김 등 지금은 흔하디 흔한 음식이 그렇게도 귀한 음식이었기에17세의 어린 행자에게는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기만 했다.
그랬으니 설거지를 하다가 남은 음식이 눈에 띌라치면 넓은 소맷자락에 만두를 슬쩍 넣는 일도 있었고 감자튀김 역시 살포시 넣었다가는 공양간 일을 마친 후에 꿀맛 같이 먹던 기억은 지금 생각해도 아련하고도 웃음나는 장면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행자시절을 견디게 해 준 에너지는 어른스님들이 주신 가르침이었고 당대를 호령하던 수승하신 선사들의 수행력이었다. 그 많은 대중의 공양을 준비하는 일에서도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절로 되었고, 초심을 익히는 초발심자경문과 발심수행장을 보는 일에서도 눈과 귀, 마음은 오롯이 하나로 귀일하는 것이었다. 그랬으니 기실은 춥다는 마음도, 힘들다는 마음도 달라붙지 못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해인사의 대중으로 살지 않고 통도사의 대중으로 살게 되는 계기가 주어지는데, 다름 아닌 청담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우신 탓이었고 통도사에 가면, 그야말로 큰 도인이 계신다는 소문이 행자들 사이에도 자자하여 틈만 나면 통도사 쪽으로 귀를 쫑긋하고 있었으며 호시탐
탐 도인을 만날 날을 노리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다. 결국 난 어찌 어찌하여 통도사로 머리를 돌렸고 나의 은사이신 경봉 스님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두 번 이나 갈아타고 통도사로 오는데 그렇게도 먼 길이었건만 너무도 가깝게 느껴졌고, 돌고 돌아 만난 나의 은사, 경봉 스님은 마치 속가의 아버지와 같은 팔척 장신의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그러나 스님의 인자하심은 정말이지 오뉴월 봄눈과 같았고 공부인으로서의 정진력은 비할 데가 없는 어른이셨다.
통신수단이라곤 편지와 몇 안 되는 전화가 전부이던 그 시절, 교통수단으로는 아주 귀한 승용차와 기차 고속버스 등이 원거리의 신도들을 실어나르는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지근거리에서 오는 인파 보다는 서울이나 경기권 혹은 지방에서 스님을 찾아오는 인파가 더 많았고 그 중에는 사회 요직의 인사들이 스님을 찾아와 덕담을 듣고 삶의 지혜를 일으키는 일이 더 허다했다.
물론, 동시대를 함께 했던 큰스님들의 행렬은 더할 나위 없었고 그런 스님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스님의 일상은 풍요롭고 충만하다는 느낌이었으며 기개는 영축산의 높이만큼, 허공의 넓이만큼 넓어보였다.
그렇게 나는 청복의 나날을 스님을 시봉하며 행자생활을 이어나갔고 출가 전이라면 얼굴도 모르고 살았을 내로라하는 인물들을 만나며 사람의 공부, 삶의 공부, 수행의 본질을 찾는 일에 몰두하고 또 몰두했다.
그랬으니 공부 역시 호시절을 만난 셈이었고, 은사 복이 많은 사람으로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일쑤였다.
하여, 행자시절이 내게는 복락의 날들이었고 지금 돌이켜봐도 꽤나 호사를 누렸다는 생각이다.
물론, 군복무를 마치고 복귀하여 살아가던 날들에도, 극락암의 소임자로서 선방의 안위를 책임지는 선원장으로서도 가열찬 한시절을 살았다는 생각이며 23년간 스님의 시자로, 상좌로 살았던 시절이 내게는 생애 최고의 선물이 아니었나 하는 소회이다.
극락이 그냥 극락이 아니었음을, 출가승이 그저 출가승이 아니었음을 스님을 떠나보내며 알았고, 희수를 앞둔 지금에도 스님을 시봉하던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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