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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계단

최상의 聖地, 가람배치의 중심 금강계단의 역사

금강계단은 연못을 메우고 건립한 통도사의 대웅전 바로 뒤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최상의 성지(聖地)이며 가람배치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금강계단의 금강이라는 말은 금강석(金剛石), 곧 다이아몬드를 의미한다. 어떤 물건이라도 금강석을 깨뜨릴 수 없지만 금강석은 모든 것을 깨뜨릴 수 있다. 그래서 불경(佛經)에서는 이러한 금강석의 강인한 특징을 반야(般若)의 지혜를 표시하는 비유로 써왔다.

곧 반야의 지혜로 모든 번뇌, 망상과 미혹의 뿌리를 끊어 버리므로 그 반야의 지혜가 금강석과 같다는 말이다. 반야의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완성함으로써 성취된다. 이 삼학 가운데서 가장 기본이 되는 바탕은 부처님의 행동을 닮아가는 연습인 계율의 실천에 있다. 계율이 기본적으로 몸에 배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그리고 계율이란 그릇과 같아서 자칫 잘못하면 깨질 우려가 항상 있다. 그래서 계의 그릇은 금강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는 삼학의 결정체이며 반야의 화현(化現)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금강과 같이 견고함으로 그 사리를 모신 계단을 금강계단이라 한다.

자장스님은 당나라에 유학하기 이전부터 철저히 계율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였다. ‘계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를 하고 백년을 살지 않겠다.’는 그의 철저한 계율의 정신은 문수보살로부터 사리와 가사를 받은 사실로 나타났고 이 불신(佛身)이 통도사에 안치됨으로써 통도사는 계율의 근본도량이 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함에 있어서 첫째 요건은 계율을 실천하는 데 있다. 그래서 승속(僧俗)을 막론하고 불문(佛門)에 들어서기 위해서 비구는 250가지 계율인 구족계(具足戒)를 받아야 하고 재가신도는 오계(五戒)를 받아야 참다운 불자(佛子)로서의 일보를 걷게 되는 것이다. 비단 출가자뿐만 아니라 불자들의 일상생활에는 항상 계율을 지키는 자세가 기본적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그래서 승려는 승려대로 청정한 모습으로 사회의 귀감이 되어야 하며 재가신도는 그 나름대로 철저한 윤리의식 속에 이 사회를 정토로 일구어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계율이 단순한 금계(禁戒)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보살계(菩薩戒)로 확산될 때 대승불교의 참된 이상(理想)이 이 땅에 펼쳐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라의 대국통 자장스님께서 이 땅에 금강계단을 설치한 참된 의미이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일은, 부처님에게서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므로 통도사의 금강계단은 오늘날 까지도 승려들의 유일한 정통을 잇는 수계(受戒)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금강계단의 초창과 중건사실 기록

중수 연대 화주(化主) 문헌(文獻)
초창 신라 선덕왕 15년(646) 자장율사(慈藏律師) 삼국유사
제 1 중수 고려 우왕 5년(1379) 월송대사(月松大師) 동문선 제73권
제 2 중수 조선 선조 30년(1603) 의령대사(儀靈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3 중수 조선 효종 3년 (1652) 정인대사(淨仁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4 중수 조선 숙종 31년(1705) 성능대사(性能大師) 계단원류망요록
제 5 중수 조선 영조 19년(1743)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6 중수 조선 순조 23년(1823) 홍명선사(鴻溟禪師) 금강계단중수기
제 7 중수 조선 헌종 4년(1838) 산중제덕(山中諸德) 불종찰약사
제 8 중수 조선 고종 9년(1872) 구봉화상(九鳳和尙) 불종찰약사
제 9 중수 서기 1911 구하선사(九河禪師) 금강계단 현판
제 10 보강 서기 19 박석 설치 및 석조담장

고려시대의 금강계단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민간에 유포된 당시의 이야기로는 고려초의 관직을 뜻하는 안렴사(按濂寺)가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에 예를 표한 뒤 돌 뚜껑을 들어내고 사리를 들여다보니 처음엔 긴 구렁이가 사리를 보관한 석함(石函) 속에 있는 것을 보았고 두 번째는 큰 두꺼비가 쪼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고한다. 그 뒤로는 감히 돌 뚜껑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한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긴 때인 고종 22년(1235)에 상장군 김공(金公) 이생(利生)과 유시랑(庾侍郞) 석(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돌 뚜껑을 들어내고 예를 표했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공(庾公)이 마침 갖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264년 원나라 사신들과 여러 사람들이 와서 그 돌함에 예배드렸으며, 사방의 운수승(雲水僧)들이 몰려와서 예참했다 한다.

또한 원나라에 머물던 인도의 지공(指空)[지공·나옹·무학의 3화상 중의 한 분임]스님은 금강산 법기도량(法起道場)에 참배하는 것과 금강계단의 사리와 가사에 참배하는 것을 큰 영광으로 알았으며, 또한 스님은 1326년 고려에 와서 금강산에 머물면서 계를 설하였고 통도사에 와서 금강계단을 참배하여, 가사와 사리를 친견한 공덕을 높이 평가했다. 아울러 지공스님은 고려에 들어올 때 『문수사리무생계경(文殊師利無生戒經)』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와 동일한 경전으로 생각되는 『문수사리최상승무생계경(文殊師利最上乘無生經)』목판본이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생계경』이란 “모든 중생이 유무(有無)와 성상(性相)에 집착하지 않고 수행하면 일체가 불생불멸(不生不滅)한다는 법리(法理)를 증득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1377년과 1378년에 계단은 큰 수난을 받았다. 고려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틈을 타 동해변에 왜적이 침탈이 빈번해질 때였다. 당시의 통도사 주지였던 월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다가 다시 1379년 왜적이 사리를 침탈하려고 했을 때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와야 했다.

조선시대의 금강계단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 금강계단은 또다시 왜적에 의해서 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왜적은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히도 부산 동래에 사는 백옥(白玉)거사가 왜인의 포로로 잡혔다가 그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로부터 11년 뒤인 선조 36년(1603)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은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은사이신 금강산의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에게 보냈다. 그러나 휴정스님은 “온 국토가 침탈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고 하면서 한 함은 돌려보내고 나머지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葛盤寺)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휴정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그 뒤 여러 번의 중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으로 전해오기까지 금강계단은 한국 불교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다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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