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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교신문]"조선 최고 최상의 지식기관 되기를 기도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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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74회 작성일 20-01-02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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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최상의 지식기관 되기를 기도하노라"



불기 2564년 신년 특집’
영축총림 통도사 ‘축산보림’ 창간 100년

사찰에서 발행한 최초의 잡지
주지 구하스님 원력으로 창간
민족정신 구현 불교중흥 발원

통도사 유학승과 지사들 ‘동참’
박병호 ‘혈가사’ 최초 탐정소설
이종천 ‘조선문학…’ 최초 연구


 

자장율사가 창건한 불보종찰(佛寶宗刹) 영축총림 통도사는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며
한국불교 중흥의 꽃을 피웠다. 특히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도 당간(幢竿)을 바로 세운
통도사는 전통을 유지하는 동시에 신문명을 적극 수용해 시대를 선도했다. 100년 전
탄생한 <축산보림(鷲山寶林)>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찰잡지로 불교와 민족 진로 개척이란
사명을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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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100년전 구하 큰스님의 원력으로 '축산보림'이나왔다"면서 "뜻을 이어 국지대찰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고

발원했다. 사진은 '축산보림'창간호를 살펴보는 현문스님


“오늘의 조선은 어떠한가? 소위 문명시대에 신문은 그만두고 한 권의 잡지를 발행하기 어려우니 우리 사회의 발전을 어찌 구할 것인가. 그것이 <축산보림> 잡지를 발행하는 동기다. 이 잡지의 발행은 한편으로 시대의 요구에 상응한 것으로 우리 사회동포의 생활과 인생관에 직접 관계가 있다.” 1920년 1월25일 통도사가 창간한 <축산보림> 발행사의 일부이다.

당시 통도사 주지 구하(九河, 1872~1965)스님은 경술국치(庚戌國恥) 10년이 되는 1920년 첫 달에 <축산보림>을 간행해 암울한 시대 상황을 타파하고 부처님 가르침으로 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렸다. 특히 한해 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기세를 이어 조선인들에게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고자 했다. 이전에 <원종(圓宗)>, <조선불교월보(朝鮮佛敎月報)>, <해동불보(海東佛報)>, <유심(唯心)> 등 다양한 불교잡지가 선보였지만, 사찰이 발행 주체로 나선 것은 <축산보림>이 처음이다.

20세기 초 신문과 함께 가장 앞선 뉴미디어인 잡지를 사찰에서 발간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지 않은 구하스님의 혜안(慧眼)을 확인할 수 있다. <축산보림>이란 제호에서 ‘축산’은 영축산(靈鷲山)을 줄인 말이며, ‘보림’은 ‘보배의 숲’이란 뜻이다. 통도사를 외호하는 영축산을 배경으로 독수리가 힘차게 날아오는 모습을 그린 표지의 제호는 구하스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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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스님 지원으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종천이'축산보림'에 발표한 '조선문학사개론',안확의 '조선문학사'보다

2년 빠른 최초의 국문학사 연구이다.


앞서 밝혔듯이 <축산보림> 발간은 구하스님을 중심으로 통도사 대중의 원력이 크게 작용했다. 1920년 2월에 나온 2월호에는 <축산보림> 제작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사장 김구하, 편집인 이종천(李鍾天,1890~1928), 주필 박병호(朴秉鎬, 1888~1937), 기자 강성찬(姜性璨,) 서기 강정룡(姜正龍, 1898~?)이다. 이 가운데 이종천, 강성찬, 강정룡은 구하스님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다겨오거나 이후에 일본에서 공부한 통도사 스님들이다.

특히 이종천은 그 당시 통도사 말사인 고성 옥천사에서 출가해 일본 조동종제일중학과 도요대(東洋大) 윤리철학교육과를 졸업하고 1919년 초여름에 귀국했다.

주필 박병호는 <축산보림> 제3호에 실린 ‘입사(入社)의 사(辭)’에서 “불찰대본산(佛刹大本山) 통도사 주지 김구하 화상은 능히 여사(如斯, 이와같이)한 변세(變勢)를 혜안(慧眼)으로 달관함인가, 일찍이 이종천 군을 강호(江戶, 도쿄)에 유학케 하더니”라며 구하스님의 유학 후원 사실을 밝혔다.

이종천은 동래고보 교사, 진주 불교선양강습소, 조선불교청년회에서 활동하며 교육과 포교사업에 앞장섰다. 1924년 1월 6일 서울 각황사(조계사)에서 열린 조선불교청년회 총회에서 만해스님이 총재로 선출될 때 총무를 맡았다. 조선불교청년회 초창기 살림을 책임진 인물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28년 10월 23일(음력 9월 10일) 울산에서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했다. 그해 11월 6일자 <동아일보>는 “그(이종천)의 장식(葬式,장례식)을 각 불교단체와 연합으로 성대한 의식으로 집행했다”고 보도했다. 12월 10일에는 통도사, 범어사, 울산의 불교청년회가 울산 백양사에서 공동으로 추도회를 봉행했을 만큼 교계 안팎의 신망을 받았다.

주필로 <축산보림>에 참여한 박병호는 울산 지역을 중심으로 청년운동과 민족계몽사업에 앞장선 지사(志士)다. 울산군청에서 서기로 일하기도 했지만, 1923년에는 중등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해영학원(海英學院)을 설립해 원장을 지냈고, <동아일보> 주재기자로 지역 현안을 해결하는데 나섰다.

또한 울산지역 중장년층이 참여한 민우회 총무를 역임하고, 일제 당국의 울산 왜성(倭城) 복원 박대운동을 펴기도 했다. 1931년에는 ‘전기료 인하를 위한 시민대회’를 개최해 동맹 소등(消燈)을 결의하는 등 일제에 저항한 울산지역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37년 12월 49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밖에도 강성찬, 강정룡은 이종천과 함께 통도사 스님으로 조선불교청년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통도사 지회 발족을 주도하는 등 불교청년운동을 적극 전개했다. 또한 <축산보림>에는 유재현(일본 도요대 문화학과), 조학유(일본 다이쇼대), 오봉빈(일본 도요대 윤리철학과), 손정수(울산청년회 총무) 등 통도사 스님들과 지역 청년들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축산보림>이 단순한 불교잡지가 아니라, 사찰과 지역을 연결하는 소통의 장으로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마당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축산보림>과 이를 계승한 <조음(潮音)>에는 200여 편에 이르는 다양한 글들이 실렸다. 법문과 교학 등 불교 내용뿐 아니라 소설, 수필, 시, 기행문 등 풍성한 내용을 담았다. 또한 종교학, 철학, 국문학 연구 관련 소논문을 게재해 종합잡지 성격을 보여주었다.

이같은 의지는 창간호에 실린 ‘발행사’에도 확실히 드러난다. “이 잡지는 소설(所說, 주장하는바)과 여(如, 같이)히 동기, 목적, 내용이 공(共, 함께)히 아사회(我社會)의 발전에 직접 관계라 … 차(此,이) 잡지의 장래가 조선 최고의 학술잡지 즉 최상의 지식관(知識關, 지식기관)이 되기를 기도(期圖, 기약)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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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호가 '축산보림'에 발표한 '혈가사',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이다.


구하스님도 <축산보림>에 ‘20세기의 불교’. ‘참괴(慙愧)의 가치’, ‘대자유대평등’ 등 여러 편의 글을 실었다. 스님은 ‘대자유대평등’에서 “세인의 항용(恒用, 흔히)하는 언사로 주창(主唱)하는 자유, 평등은 진정한 자유 평등이 아니다. 일반 세인의 소위 자유 평등에는 구속이 유(有)하며, 이와같이 구속이 있고 제한이 있으면 어찌 자유라 이르겠는가”라면서 “대평등의 견지에 입(立)한 자는 차별의 진경(塵境)애(에) 처하여 대자재즉대자유(大自在卽大自由)를 득(得)함이라”고 강조했다.

구하스님의 글과 더불어 <축산보림>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을 꼽으라면 이종천의 ‘조선문학사개론(朝鮮文學史槪論)’과 박병호의 ‘혈가사(血袈裟)’를 빼놓을 수 없다. ‘조선문학사개론’은 1922년 안확(安廓)이 발표한 ‘조선문학사’보다 2년이나 빠른 국문학사 연구이며, ‘혈가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탐정(추리) 소설이다. 두 글 모두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고,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아 구하스님과 <축산보림>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종천은 <축산보림> 2호,3호,4호에 연재한 ‘조선문학사개론’에서 민족의 시조인 단군(檀君)을 처음부터 언급하며 민족의식을 확실히 천명했다. 이 글의 첫머리에 “단목(檀木) 하(下)의 하룻밤 신화는 우리 역사의 산모(産母)라. 조선 민족과 그 역사는 이 신화로부터 왔으며, 그 분계선(分界線)을 세워 4000년 국사를 주심은 단군의 위대한 인격에 관한 표현이다”라고 적시했다.

또한 이종천은 불교가 조선문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삼국시대에 불교의 수입은 한천감우(旱天甘雨, 가뭄의 단비)와 같이 시대의 요구에 의한 필연적 결과이다. 불교는 파천황(破天荒, 이전에 아무도 못한 일)의 기세로 전도(全島)에 파급되어 오래도록 위축된 사상계에 신광명(新光明)을 공급하고 동시에 조선문학에 특수한 위력을 열었다.”

아쉽게도 이종천의 ‘조선문학사개론’에 대한 학계의 관심을 아직까지 미미한 상황이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임에도 우리나라 문학사를 체계적이고 민족적 입장에서 조명한 사실에 대한 연구의 필요이 제기되고 있다.

박병호가 <축산보림> 4호, 5호, 6호와 <조음> 1호에 연재한 ‘혈가사’도 한국문학사에 의미있는 발자취를 남겼다. 경성에서 일어난 연쇄살인사건을 소재로, 3·1운동 이후의 반일(反日)사상을 표현해 일제강점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며 새로운 조선의 건설을 꿈꾸었다.

<조음>의 발행 중단으로 ‘혈가사’는 1926년 11월 내용을 보완해 단행본으로 나왔다. 발간 직후 일제당국에 의해 압수됐다 지난 2002년 10월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서 발견돼 다시 빛을 봤다.

이밖에도 <축산보림>에는 스님들과 문인들의 글을 게재하면서 민족 정신을 깨우치고 불교를 전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경고를 받았고 결국 발행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현재 통도사(주지 현문스님)가 발간하는 <월간 통도>는 100년 전 구하스님이 사장을 맡아 선보인 <축산보림>의 전통을 잇고 있다.

영축총림 통도사 주지 현문스님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축산보림>을 발간하는 결단을 내린 구하큰스님은 30년 이상 세상을 내다본 어른”이라면서 “큰스님께서 <축산보림>을 펴낸지 100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를 맞아 감회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현문스님은 “겨레와 불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신 큰스님의 뜻을 바르게 이어나가겠다”면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종찰이며 국지대찰로서 현대인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도량으로 자리매김하겠다”고 밝혔다.

통도사=이성수 기자 soolee@ibulgyo.com

[불교신문3547호/2020년1월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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