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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영축총림 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 도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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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21회 작성일 17-10-1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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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공부하는 데 장애가 없을 정도면 좋겠습니다.”

 

영축총림 율학승가대학원 교수사 도암스님

 

이 행자는 중 상호구만! 잘 해봐!”

내 사제 하자~”

내 상좌하지!”

 

이구동성으로 들려준 말의 요지는 저마다 가까이 두고 싶다는 얘기였다. 그 덕담의 주인공은 영축율원 교수사 도암스님이다.

1990년 해인사로 출가한 도암스님은 석 달 동안 해인사 행자생활의 매운 맛을 본 셈이다. 엄격하고 살벌하다고 소문이 파다했던

해인사의 행자생활은 역시 도암스님의 정서와는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통도사로 오게 되는데 당시 방장 월하노스님의 한 말씀은

새파란 행자의 앞날을 예고하는 소중한 덕담이었다.

이 행자는 딱 중 상호로 구만! 잘 해보라구~”

 

해인총림, 그리고 영축총림에서의 행자생활은 그렇게 반듯한 모범답안 같은 한 사람의 승려 탄생을 예고했다.

모범답안이라고 기술하는 기자에게 도암스님은 주저없이 건넸다.

“‘재수없는 도반이였지. 누구는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시간만 나면 천배를 하고 있었고,

피하고자 했으나 입승을 맡아 제법 무리 없이 해냈단 말이지. 그러니 재수없지요.(웃음)”

도암스님이 들려준 스님의 행자시절은 그렇게 정석이였다.

 

내가 통도사로 온 것은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4월경이었다. 몇 명의 행자도반들이 있었는데

그중 지금도 많은 부분함께 하는 도반이 진목스님이다.

입방한 번호로 치자면 난 첫 번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중의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 내가 대표로 나서서 해야하는 일이 빈번했다.

무엇을 뛰어나게 잘해서가 아니라 입방 순서가 빠른 도반들이 있었음에도 그즐의 사정상 내게 맡겨지는 소임들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결국은 입승 소임을 맟아야 했고 후원의 일을 어느 정도 쳐 낸 시간이면 어김없이 대웅전에 가서 천배를 오렸다.

그것은 해인사 행자시절때부터 익힌 몸 수행의 출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탓에 절을 하면 몸도 건강해지고

수행력도 깃들 것이라는 판단으로 수시로 절을 했던 것이다.

또한 행자들에게는 초발심자경문등의 경전을 수학하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현재 통도사의

강주 소임을 맡고 있는 현진스님은 그시절에도 경을 정확히 공부해 행자들을 가르치는 훌륭한 강사였다.

읽고 서령하거나 받아 적고 논강을 하는 시간이면 그렇게도 좋았다. 배우는 기쁨이 있었고,

강사스님의 빼어난 실력은 발심을 고조시키는 동기유발이었고 날마다 풍요로워진다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하게도 했으니 말이다.

또한 빠르되 안정적인 몸놀림과 벗어나지 말아야 할 순간의 활동들은 해인사에서 먼저 익힌 자산으로 통도사 사문으로의 생활에 

 커다란 밑거름이 돼 주었으며 고되고 힘든 여정이 준 달디단 열매와도 같았다.

그러니 경험이란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반드시 겪어야 할 행자생활의 과정은 인욕의 순간이고,

후일의 삶에 있지 자양분임이 자명하다.

 

지금은 행자생활도 6개월로 바뀌어 세속의 변화에 편승하는 듯 하지만 과거에는 길게하는 것을 장려했고 긴 행자생활을 나무라는 법은 없었다.

물론 우리들의 윗세대, 그 보다 더 어른스님들 시대에는 몇 년씩 행자생활을 하기도 했으니 내가 경험한 행자생활을 크게 자랑할 바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얼마 전 있는 행자교육원 수계식처럼 행자생활을 수료하고 행자교육원 수계식을 받아야 사미, 사미니가 되는 교육과정을 제정했는데

바로 행자교육원 1기가 나를 비롯한 우리 기수들이다. 그러니 좀 의미가 있는 수계도만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행자들은 초하루나 관음재일이 중요하기보다는 바쁜 날 일이 많이 주어지는 것이 중요한날로 인식되는데 그해 초파일 때 수많은 대중들이

공양을 하고 난 그러을 씻어야 하는 소임이 내게 주어졌다. 엄청난 양의 그릇이었다. 옆에 있던 행자가 말했다.“이많은 그릇을 다 씻으라고!”라며 힘듦을 토로하는 거였다.

그러나 난 주어지는 대로 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세우고 살아온 탓에 그날의 반응도 덤덤할 따름이었다.

하면 되지, 할수 있는 일이니 주어질테지.’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씻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샌가 신도들이 하나 둘 모여들더니 산더미처럼 쌓인 그릇을 씻어주는 것이 아닌가.감사한 마음은 높푸른 그날의 하늘만큼 넓고도 높았다.

그러니 마음 씀의 모양은 쓰는대로, 내는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어느 가을날 난 법당에서 다시 기도를 하며 지극한 발원 한 가지를 올렸다.

부처님, 저는 공부하는데 장애가 없을 정도면 좋겠습니다.”라며 절을 했다. 부처님 전에서의 발원이나 불도량에서의 발원 세속의 백년 발원과 같다고 했다.

그 덕으로 난 지금도 공부를 지어 감에 있어서도 후학들을 이끎에도 비교적 순탄한 승려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감사할 따름이다.

 

출가 전, 철학을 전공한 도암스님은 이후, 동국대 불교학과로 편입을 하여 불교학을 익혔으며 다시 봉선사 월운스님 문하에서 현재의 율원장 덕문스님,

전 관룡사 주지 우현스님, 무위스님 등과 함께 경전공부를 했다.

몇 해의 공부가 진행되었을 즈음, 스님이 월운스님의 문하를 떠나올 것을 아뢰니, 월운스님은 다른 도반을 불러 말씀하셨단다.

도암이 다를 꺽어놔, 그래야 못 도망가지 , 꺾어 놓으면 그 나머진 내가 책임지으마라고.

얼마나 아끼셨으면 그런 호령을 하셨을가. 결국 도암스님은 봉선사 학림에 남아 수학의 기쁨과 탁마의 시간을 보탤수 있었다.

4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봉선사를 떠나오던 날, 월운스님은 말씀하셨다.

뜸이 졸 덜 들었어. 경을 손에서 놓지 말고 보거라.”

아직도 경을 보고 있는 도암스님이 유독 빛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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