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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전 송광사 율원장 도일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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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80회 작성일 17-08-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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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법 가깝게 사는 일 가장 중요

승가란 민주적이지 않아, 목표가 한 가지이므로

 

전 송광사 율원장 도일스님

 

불교의 근본적 가르침은 수행이고 깨달음이다. 그것은 사회생활과는 별개로

오로지 한 가지의 목적을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나 수행과 깨달음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사찰ㄹ로 들어가는 이를 만날수

있는 일도 기실은 드문 일이다. 그렇듯, 전혀 비장하지 않을 것 같으 동기에

의해 출가를 하고, 기대 밖의 행자로 살았으나 기대했던 행자들을 뒤로 하고

오히려 기대에 부응한 수행자로 갈아가는 납자가 있다.

 

사원에서의 하룻밤은 세속에서의 100년과 같다는 말처럼 한 소년의 삶은 온전히 인내이고,

오롯이 수행자로의 삶을 지향할 따름이었다. 송광사에서 10년간

율원장 소임을 살았던 도일스님의 출가이야기이다.



도일스님은 미타암으로 출가를 했다.

생활이 녹록치않던 시절이었으므로 은사 월파스님이 계신 미타암은 곤궁한 삶을 견디게 해 줄

든든한 거처이기도 했으며 산사에서 필요했던 적절한 노동력을 대신해 주는 삶의 현장이기도 했다.

 

당시, 미타암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꼭대기 암자였다.

예나 지금이나 기도처로 수행처로는 두말 할 나위 없는 곳이 그곳이었다.

한달이면 중요 법회일인 이틀정도만 경운기의 모터를 이용해 불을 밝히던 천성산 8부 능선의 암자,

그 미타암에는 도일스님을 위시하여 세명의 행자가 더 있었다. 유년시절부터 유독 몸이 약했던

도일스님은 행자시절에도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의 깡마른 체구였고 어디에 가도 눈에 띄는

외양은 못되었다고,

 

그래서 였을까. 다른 행자들에 비하여 도일스님은 은사스님의 총애를 받는 쪽도 아니었으며 늘상 부족한

행자, 흡족하지 않은 행자로 은사님에게는 기대 밖의 상좌였다.

 

그러나, 공부를 많이 가르친 자식보다 가르치지않은 자식이 효도를 한다고, 도일스님 역시 은사스님의

눈을 벗어난 행자였으나 으뜸의 상좌로 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몇번이고 보따리를 까고 풀고를 반복했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설움을 겪던 시절은 어디에도  비교 할 바가 아니었으나 스님은 그누구보다 앞서 나갔다.

 

열두살 소년으로 입산하여 열다섯 살이 되어 계를 받았는데 무속인들의 예언과 그많던 주변인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과 까워보겠노라는 굳은 각오로 그렇게 나이를 보태고 법을 익혀 나갔다.

 

삶은 언제나 연극이고, 그것은 생방송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사람의 인생에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수도 있고, 나락으로 내려 앉는 행태를 만나기도 한다.

 

삶은 언제나 연극이고, 그것은 생방송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에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수 도 있고, 나락으로 내려 앉는 형태를 만나기도 한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던 탓에 초등학교 운동회의 기마전에서 도일스님은 기마병들이 마련해 준 그들의 목을 오라 탄 말로

분해 여러 친구들 위에 우뚝 섰다. 그런데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 세상은 평소 만나던 풍경이 아니었다.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본다는 사실이 너무도 가슴 벅찬 경험이었고 이위에서 죽어도 좋다.‘라는 생각이 드는겁니다.

누군가가 나를 떠 받들어준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기분 좋은 일이 될줄은 몰랐습니다.”

살아 볼 만 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선생님에게 듣는 칭찬은 어쩌면 비구 도일을 있게한 단초가 분명했다.

그랬으니 칭찬에 인색한 은사스님에게서의 패배감도 그 기억을 떠올리면 적잖이 상쇄되는 느낌이었을 테고 ,

더는 통도사 강원을 거쳐 중국, 대만 그리고 영국으로의 긴 만행을 통해 실로 거듭나는 공부로 역정의 기회를 엿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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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장을 보고 또 보며 율의를 익혔다. 송광사 율원의 소임자가 되어 깨닫게 된 소회란 모든 은사스님들은 은사 되는 법,

제자되는 법을 익혀야 한다. ‘은사되면 아버지처럼 아들을 돌봐라.‘라고 되어 있다. 지금 스님 되는 사람들은 그 공부를 제대로 해야 한다.”라며 일침을 가하는 스님이다.

 

힘든 시간이었겠지만 그래도 즐거웠던 기억은 있으셨을텐데요

천성산 전체가 우리 산이므로 그 넓은 무대를 내집인양 뛰어다니던 때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행자도반들과

내원사에 놀러가 유명한 솔차를 얻어 마셨는데 한병을 다 먹고 정신을 잃었지요. 눈을 뜨니 비구니스님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돌아와 은사스님께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던 기억이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도일스님은 상좌를 두지 않았다. 이유인즉, ‘뒷바라지 해줄 은사가 되어야 하는데

그런 여건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라고 했다.

, 송광사 율원 출신의 후학들이 있어 스님은 언제나 든든하다.

그런 제자들에게 이러주는 스승으로서의 당부란출가의 몸이니 부처님 법 가깝게 사는 것이 좋다. 승가는 결코 민주적이지 않다.

승가는 목표가 하나다. 그러므로 투표가 필요치 않다.

승려의 사는 모습은 열사람의 의견이 같아야 하며 한사람이라도 뜻이 다르면 그를 이해해고

설득하여 같게 하는 화합의 모습이 진정한 승가이다. 이것이 불교법이다.

 

부처님 법으로 가면 문제가 안된다. 왜머리 깎았는지 그것만 생각하다. 깨달음을 향하고 쓸데없는 욕심을 버려라.

 실천이 힘들다 해도 머릿속에는 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못하면 부끄러워 할 줄은 알아야 한다.“

 

도일스님에게 가장 아름다운 기억은 언제였을까

늦게 사유를 통해, 제대로 이해되었다. 나라는 존재는 오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오온이라는 것은 연기라는 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 것을 사유할 때 기쁨이 온다. 육체적 어려움이 있을 때 더 생각을 해본다. 그곳에 기쁨이 있다. 그것이 법력이다. 아주 클리어 하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된다. 그 사실이 이해되던 순간 최고의 법열이 느껴졌다.”라며

그 아름다운 기억은 지금도 진행중이라고 또렷이 그리고 분명히 밝히는 스님이다.

 

오래보고 싶은 스님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이 금쪽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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