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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양산 성전암 주지 도승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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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530회 작성일 17-06-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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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이야기_ 도승스님

 

박종철 열사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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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의 취임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던 이들까지도 그의 사람으로 만 들었음직한 취임의 변이었다.

마치, 비로소 진정한 민주주의가 시작될 것만 같은 날이었고,

움츠렸던 인간존엄의 의식들이 제 날을 맞은 듯 그렇게 피 끓는 애국심을 고조시킨 취임사였다.

80년대 민주화의 열망은 수많은 열사들을 배출했고 또 누군가는 산화되어 이미 역사 속 인물들로 남아있을 따름이다.

그런 기억으로만 머물던 역사 속 인물들을 하나둘 꺼내어 놓아도 좋을 법한 사연의 언저리에 한 스님이 존재한다.

열사도 투쟁의 대열에도 서 있지 않았으나 결코 떼놓을 수 없는 스님은 다름 아닌, 성전암 주지 도승스님이다.

 

얘기인즉, 박종철 열사의 49재를 봉행했던 도승스님이기에 사리암이라는 부산의 작은 암자와 박종철,

도승스님은 불가분의 인연으로 우리 곁에 자리한 지, 어언 30년의 세월이다.

얼마 전, 양산 성전암은 박종철 열사의 30주기를지낸 바 있으며 그 자리에서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옹은

이제는 더 이상 재를 지내지 않아도 좋다는 인사를 건넨 바 있다. 그러나 도승스님의 답례사는 달랐다.

 “ 내가 살아있는 한, 재는 지낼 겁니다.뭐 힘든 일이라고 그만 한단 말입니까, 이 절, 저 절 마다 하던 시절에도

나는 반드시 내가 할 일이라 생각해 넙죽 받아 지냈는데, 세월 지나 지낼 만큼 지냈다고 더 지내지 않는 것은 맞지 않지요.”

 소신 분명한 도승스님을 만났다.

 

그림에 능하고, 글씨에 능하며 도예 등 고서에도 일가견이 있는 도승스님은 영락없는 도인의 자태이다.

말수가 적은 도승스님은 아는 사람만이 진면목을 알기에 스님이 지닌 를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어느 날, 고수의 한수를 염탐이라도 작정한 듯 스님을 찾았다.

가겠노라 연락을 했던 날에서 며칠을 지내고 찾아 뵜음에도 고수는 달랐다.

하등의 요청을 하지 않았으나 도승스님의 설명은 마치 실타래가 풀려나오듯 했고,

뱃전에서 어획을 위한 밧줄을 바닷속으로 풀어헤치는 어부의 그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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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는 원 래, 화 엄 사 로 출 가 를 했 다.

어린 나이에 화엄사를 갔는데, 화엄사가 그렇게도먹고 살기 힘든 절 인줄은 미처 몰랐다.

그런데 더화엄사에 머물지 못했던 결정적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강원이 없었던 것이다. 강원에 들어가 공부를 해야 하는데 공부길이 막혔다는 것이 내가 더 화엄사에 머물 수 없던 이유였지.

그래서 난 모심기가 한창이던 때, 구례 화개장터까지 어둠을 뚫고 걸어 나왔고 꼬박 하루를 걸려 통도사로 온 거였지.

그게 내가 통도사 중이 된 결정적 동기였어.

 

19세에 화엄사로 출가를 했고 공양간에서, 그리고 새벽 도량석을 하는 행자로도 아주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화엄사는 저녁에도 도량석을 하게 했다.

체구가 크지 않으면서도 몸이 약했던 난 화엄사 각황전 앞 그 높은 축대 위에서 도량석을 하

다 떨어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 일 역시 나의 행자생활에서는 크나큰 사건이었다.

그런가하면 녹차가 많이 나는 화개, 하동 일대의 지리적 여건은 갖은 종류의 차를 먹을 수 있는 기회도 다양하게 주어졌는데

황차를 귀한 줄 모르고 마시던 기억과 누룽지를 끓여 어른스님들께 드시게 해 드리면 고뿌로 불리어지던

작은 찻사발 같은 잔에 그 구수한 누룽지를 꿀맛같이 들곤 하던 어른 스님들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다.

또한 겨울이면 군불을 떼서 방을 데우는데 장작을 아궁이에 가득 넣어두면 어른 스님이 슬쩍 다가와 장작의 절반을 다시 꺼내어

찬물을 끼얹어 장작을 아끼던 모습은 어린 눈에도 너무나 인색하게 느껴졌으며 만류도 못하고 안타까워하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가슴 찡한 회상이다.

그러나 68년도에 통도사 대중이 되어 살아가던 추억은 지금도 아련하기만 하다. 다름 아닌,

정우스님 역시 전라도의 모 사찰에서 행자생활을 하다 통도사로 와 함께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정우스님은 공양간의 행자로, 나는 채공으로 그렇게 사문의 첫발을 함께 내딛는 사이였다.

그러니 현문, 정우, 영배스님 등 전, 현직 통도사 주지 소임을 역임한 스님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나와 도반들이었으니

세속의 나이를 떠나 한 시절을 함께 뒹굴던 탁마도반들은 지금도 통도사의, 종단의 내로라하는 소임자로 나름의 회상을 꾸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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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나는 그 유명()한 통도사 강원 15기 도반이며 군대를 다녀온 탓에 재 입방하여 공부한 인연으로

19기 강원들과도 도반 관계를 맺고 있으니 같은 강원을 두 번씩이나 다닌 참 보기 드문 이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한편, 화엄사에서 통도사로 건너 온 나에게도 새 은사가 정해져야 했는데

당시 통도사에는 월하 노스님, 벽안 노스님, 홍법 노스님 등이 사셨으며 그분들로 인해 영축산의 위용을 더욱 견고하게 하던 때 였다.

그러나 다른 행자들을 비롯해 많은 도반들은 월하노스님을 은사로 모시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달랐다.

출가 전, 사회성을 띈 참여 등 삶이 대쪽 같았던 벽안스님의 시봉이 되고 싶었고 결국 벽안노스님의 법상좌가 되어 공부길을 이어가게 된 것이었다.

대쪽 같았던 은사에게서 어떤 가르침을 익혔을까.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정신과 그릇된 것이라면 어떤 일에서도 행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은

은사스님이 일러주신 말씀이기도 했다.

강원을 졸업하고 부산으로 거처를 옮긴 나는 사리암의 주지로 20여 년 가까운 세월을 도심사찰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서슬 퍼런 민주화 시절의 대표사건인 박종철 열사의 재를 지내는 일을 마다하거나 고사하는 분위기였지만 무엇가가 잡아끌듯 당당히 맡았다.

그랬으니 막재를 지내던 날에는 절 주변에 500여명의 경찰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종단 내에서도 이단아가 된 것이었다.

주변의 도반들은 내게 말한다. 소신의 행보를 걸어왔다고. 진정 소신이었을까.

다시 점검한다. 적어도 세월 지나 과거를 후회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족한 중생의 습을 벗기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아침이면 또 다시 원을 세우고, 저녁이면 다시 참회의 시간을 갖는다.

출가사문으로서 갖추고 새겨야 할 것은 아직도 끝이 없다.

논밭이 즐비하며 길이 없던 이 곳을 장화를 신고 걸어 들어온 것이 벌써 25년이다.

그렇듯 성전암을 일구기 시작하여 이제는 성전암에서 출가 50년을 추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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