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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지준 인산 영축총림 통도사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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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852회 작성일 17-05-0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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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행자시절 이야기_지준 스님 |


지준 인산 영축총림 통도사 박물관장

평생 영축산인으로 살아온 스님

통도사 성보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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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야말로 통도사인이고 영축산인이다.

이는 부끄럽고 민망한 표현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평생을 이곳 영축산 품안에서 살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표현이다.

나는 통도사 옆 평산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그리고 나의 놀이터는 통도사 부도전 옆이었다.

친구들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노니던 곳은 언제나 통도사를 끼고 있는 개천이거나 당시 속인들의

삶의 터전이던 부도전이었다.

7남매 중 여섯 번째의 서열이던 나는 아들 중에서는 막내에 속했다. 형과 누나들 속에서 자란 나는

종종 집에 와서 쉬어가곤 하던 경봉스님을 뵈며 자랐고 무시로 드나들던 스님들은 나에게 있어

어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은 경봉 노스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시는 거다.

이놈아, 너는 단명할 놈이야.” 라시며 절에 가서 살기를 권유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제가 많은 우리 집에서는 한 명이라도 입을 덜면 살기가 좀 수월했을 일이었고

더욱이 학교를 휴학 하게 되면 학비를 줄일 수 있었기에 노스님의 말씀은 출가 이전,

곡진한 삶의 멍에를 벗을 수 있다는 구실로도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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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1년 쉬었다가 고등학교를 가라는 아버지의 권유도 있고 하여 극락암으로 향했다.

당시 극락암에는 나보다 속세 나이 두 살이 더 위인 스님이 있었고 경봉 노스님은그 스님에게 나를 벽안스님에게

데려다주라는 말씀을 하셨다. 바로 그날 저녁부터 통도사 주지를 맡고 계시던 벽안스님의 시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첫날 저녁 벽안스님께서는 나를 보고 붓을 잡아 글을 쓰게 하셨다. 난 스님이 하라는 대로 붓을 들어

뫼 산자를 썼다. 그랬더니 스님 왈, “너는 금생에 붓을 잡지 마라. 붓글씨 한다고 고생 하지 말고 허송세월도

하지 마라. 이중고가 따라 다닐 것이니라는 말씀을 해 주셨고, 그 다음으로 바둑을 두지 말라.” 하셨다.

바둑을 두게 되면 부처님 공부와 멀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염불 역시 하지 말라 하셨다.

그 이유 역시, 재주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그리곤, “그 세 가지를 하지 않고 통도사에 오래 살면 훗날,

좋은 스님으로 인정받게 된다.”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 마지막 말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튼, 1965년부터 1967년까지 주지스님 시자를 살았고 1968년도에는 스님을 모시며 강원에서 청강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서장을 배우고 도서를 배우는데 불교 공부에서도, 삶에서도 한창 흥미를 느끼던 시절이었고 무엇을 해도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시절이었다. 그리곤 나이 19세이던 정월, 은사스님을 따라 백운암을 올랐다.

스님께서는 나를 데리고 백운암을 올라 7일 기도를 하기로 마음 먹고 백운암을 오르셨던 것이다.

당시 스님 께서는 기도에 임하기 전, 의미심장한 말씀을 해오시는 거였다.

인산아, 이젠 너희 집도 먹고 살만 하니 마을에 내려가 살지 않을래 그리하여 학교도 다니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

라는 말씀이었다.

난 스님의 말씀이 끝나기 무섭게 네네, 내려가겠습니다.”며 단 1초도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는 판단으로 힘찬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중학교 졸업과 함께 대부분의 친구들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상급학교 진학을 얘기하곤

했었지만 그 무리에 끼지 못한 나로서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셈이었기에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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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진학을 한다는 희망은 행자로, 혹은 강원의 학인으로 눌러앉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이기도 했으며

흥분된 마음은 이미 학교로 향하고 있었기에 일주일간의 기도중 나흘간의 시간은 마치 4년 과도 같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나 닷새째 되던 날, 난 행자시절이 떠올랐고 어렵사리 행자시절을 마친 의미를 찾아야했다.

그리 하여 사흘이라는 시간을 오롯이 기도로 임했고 급기야 남들 보다 늦은 5월에 부산 해동고에 입학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 자연 숙식은 부산에서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영도 대흥사에서 통학을 하며 고교생활을 마쳤고

다시 동국대 불교미술과에 입학해 불교미술 공부에 진력하며 대학생활을 이어 가게 된 것이다.

입을 하나 덜면 집안의 살림이 좀 수월해질 것 같았던 그 시절, 그렇게 난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와 전문교육까지

이수하게 되는 복을 누렸고 나아가 71년도에는 월남 맹호부태로 파병되어 산문 밖 생활의 유일한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복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다시 통도사 강원에 입방 후, 79년 가을 강원졸업의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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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시절의 일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문 밖 신평에서 이동식 영화관이 열린다는 소문을 듣고 겁 없이

도반 두 명과 함께 산문 밖을 걸어 나가 영화를 보기 위해 월담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고됐던 영화상영은 되지 않았고 우린 되돌아 올라오던 중 냇가에 앉아 이야기 삼매에 빠졌고 도량에 도착하니

새벽 3시 반이었다. 그 시각 시자 방에서는 죽비소리가 났고 당시 찰중을 보던 월파스님(현 원로의원)은 큰 체격으로

우리를 나무 랐다.

잘못을 저지른 입장인지라 빌고 용서를 구하는 길밖에 없었고, 제발 은사스님께 이르지만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월파스님은 우리들에게 3천배를 하게 했고 감로당 앞 해우소 청소를 하게 하며 참회의 기회를 주었다.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하얗다. 만약 스님께 우리들의 만행이 전달되었더라면 난 어쩜

산문출송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며 이 회색 옷을 입고 있지 않을 수도 있을 일이다.

그 후 난 통도사 종무소의 다양한 소임을 두루 거치며 10년의 종무소 소임자 생활과 22년간의 말사 주지 소임을 고루

맡게 되는데 그것이 굳이 애 쓰지 않아도 맡아왔던 내 수행자로서의 삶 일지도 모른다. 나의 은사 벽안스님은 공과 사가

엄격한 분이셨다. 출가 전, 경주 내남면 면장을 지내신 스님은 출가 이후에는 조계종 종법을 만드셨으며 12년간

종회의장을 지내셨고 종단 정법과 사회소송 등을 도맡아 하신 분이었다. 또한 통도사의 호랑이라는 별칭이 붙은 스님은

주지 소임을 보면서도 밤 11시면 반드시 사중을 한 바퀴 돌며 대중의 안위와 도량의 안위를 점검하셨고 상좌들이나

학인들에게 당부나 지시를 함에 있어서도 두 번째까지는 말씀을 하셔도 세 번째는 절대 하는 법이 없는 어른이 었다.

그 오래 전, 신평에서 통도사까지 뛰어서 심부름을 다니던 나는 이제 내가 모시던 어른스님의 세수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스님의 은덕으로 불교미술을 공부했고, 스님과 부처님의 은덕으로 통도사의 중으로 평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평생 절에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던 초심자 시절의 발원이 우주법계에 닿았는 지, 난 무던히 이렇듯 절을 지키며 절밥을 축내며 살아가고 있다. 뼛 속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img title="20170501103957545.jpg" src="http://www.tongdosa.or.kr/upload/20170501103957545.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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