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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서운암 도진스님의 행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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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296회 작성일 18-05-0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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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보다 좋은 길은 없다.”



모로봐도 바로봐도스님. 서운암 동진스님의 행자시절

 

 

통도사 떠나면 죽는 줄 알았다. 이 넓고 큰 도량에 깃들어 산 탓인지 어쩌다 가게 되는 작은 절에서의 하루,

이틀이란 마치 성에 차지 않는 무언가를 떨떠름하게 받아 쥔 느낌이었다.

통도사만한 도량을 만나 본 적이 없었으며 출가승으로 살아가는 이 일 이상은 없다는 생각이다.”

30여 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회고하는 서운암 감원 동진스님이 만면에 미소를 머금고 술회하는 대목이다.

 

견줄 만한 어떤 것도 없는 출가사문,

이곳이 아니라면 존재의 가치도 찾기 어렵다는 시문, 그런 간단없는 답을 들려준 주인공 동진스님은 실로 승려이다.

 

눌러 쓴 털실 모자 아래로 질박하게 묻어나는 무표정의 외양이 그러하고.

어쩌다가 씨익 웃어보이는 입매에서는 예상치 못한 선함과 착함이 동시에 묻어나는데

그 모습이 오랜 세월 수좌동진스님으로 살아온 수행이력이다.

 

10만 평의 대지가 독무대이고. 지천으로 피어있는 들꽃은 스님이 딛고 선 자리의 부동의 장엄이다.

이제 동진스님은 서운암의 감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봄이면 들꽃과 등식을 이루고 초여름이면 염색축제로 또 한번 등식을 같이 하는 동진스님에게도 행자시절 이야기는

미소가 먼저 떠올려지는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지금에 비하자면 이른 출가라 할 수 있지만 내 출가는 그리 이른 편은 아니었다.

스물여덟의 일이었으니 바깥사정을 어느 정도 알 만큼 안 나이에 출가를 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내 무딤은 군데군데에서 불거졌다. 공양간을 누비다 종무소를 다녀와야 하는 상황이면

여지없이 헤매기를 반복했고 많은 대문(천왕문, 불이문, 일주문등)은 꺼벙함으로 대변되는

내 성향에 더는 기대를 할 수 없는 행자의 어리숙함을 더해주는 진정 통과의례였다.

 

36년 전, 그 시절의 행자들은 숫자도 꽤나 됐다. 많기도 했거니와 그런 만큼 많은 도태도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언제나 반타작정도의 수확은 거뒀던 것으로 기억되니 지금도 승려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문수, 성민, 해인, 남월, 보덕스님 등은 행자시절을 함께 보낸 도반이기도 하였으며 강원 도반이기도 했다.

그렇게 행자생활이 끝날즈음, 은사를 정할 때가 되었을 때 누군가의 귀띔은 빗나간 한수였다.

다름 아닌 , 중광스님을 은사로 모시는 것이 어떻겠냐는 조언이었다.

그림을 그리고 각을 하는 중광스님을 찾아가 무엇을 하다왔느냐는 질문을 받게 되면 조각을 하다 왔습니다.”라는

답을 하라는 귀띔이 그것이었다. 이대 목동 병원 뒤쪽에 자리한 감로암이라는 암자에 계신 중광스님을 뵙고는 역시나

그와 같은 질문을 받았고 일러준 대로 답을 했다. 그런데 스님은 손을 펴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평생 잊지 못할 말로 내 거짓부렁에 보기 좋게 일갈을 가하시는 거였다.

이새끼, 소풀비다 온 놈이 뭐라캐쌌노!”라는 외마디였다. 결국 난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

그리고는 다시 정대스님께 찾아가라는 충언에도 불구 , 통도사로 내려와 나의 은사 성파스님을 만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무엇인가 거룩한 의식이 주어질 것만 같았고 , 엄숙한 절타에 의해 은사와 상좌가 정해지고 법명이 쥐어지는 줄 알았으나

그렇게까지 모양에 치우치는 절차는 아니었다.

그런데 은사스님은 지금처러믜 응대와 똑같은 말씀으로 그럼, 그래 하지 뭐라는 간결한 한 말씀이셨고

이내 몇 개의 법명을 쓴 종이가 행자를 마친 우리들 앞에 놓였는데 그중 하나를 주우라는

소임스님의 지시에 따라 가장 먼저 내가 주워들었다.

 

동지이라는 법명을 가장 먼저 집어든 내 소행은 출가 40여 년을 내다보고 있는 오늘 내 삶에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누가 그랬던가. 태어난 일시만큼 중요한 것이 이름자라고 말이다. 그러니 내 이름 동진으로

난 평생을 이곳 영축산을 벗어날 줄 모르고 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왕 풀어놓은 행자시절 일화 가운데 한 두 가지를 더 밝힌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그릇씻고 정리정돈을 하며 사는 일상을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내 별칭이 노행자였는데 무디기가 일등인 난 그 말이 뭐든 정리정돈에 능하고

공부를 잘 하기 때문에 붙이는 호칭인줄 알았으나 말 그대로 나이가 많기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었다는 말씀이었다.

또한 라면조차도 먹어서는 안되는 행자실에서 대중공사에 붙일 만큼의 위험행위를 한 것은 행자시절 기억 중

결코 잋혀지지 않을 민망한 일이 있었다. 어떤 루트로인지 마깥음식을 구해 행자실 뒤 마루에 놓고 시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는데

역시 수마에 빠진 수행자를 죽비로 내리친 행위와 흡사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다.

 

바깥음식을 고양이가 먹어치운 것이다. 그도 설거지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깔끔하게.

도반들의 망연자실해 하던 표정은 지금도 역력하다. 무엇이든 뿌린대로 거둔다.

수좌로 살아온 시간, 소임자로 살아가는 시간 모두 내 살림이기에 요행은 금물이며 소홀함은 사절이다.

그리하여 후일,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승려이면 족하다.

 

특별할 것도 없는 사문, 특별히 기억할 일도 없는 이름 없는 출가승이면 그만이다.

오늘 봄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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