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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시절 이야기

옥련암 법선스님의 행자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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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04회 작성일 18-03-08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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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빛의 집에 기대어 살아가는

               '나는 영원한 행자'

 

옥련암 법선스님의 행자시절


"'박행자, 법선, 내 상좌!' 눈물이 한 움큼 떨어졌다. 내 모든 것을 일시에 꺾어놓는 말씀이었다."

벌써 45년 전의 일이 되었건만 그 대목에서는 지금도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법선스님이다. 마주 앉은 객의 눈에서도

핑그르 눈물이 일렁였고 온몸에서는 전율이 들었다.

약관 스무살의나이로 출가를 감행했느나 안타깝게도 조계종 사찰이 아니었다. 공부가 너무도 하고 싶었다.

어떤 식으로 하는지도, 누구를 찾아야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지 몰라 헤매다 법복을 입고 재출가를 한 곳이 통도사였다.

그렇게 산문을 들어선지 어언 45년이 된 법선스님은 옥련암에서 산문까지, 신평마을에서 옥련암까지 겉는 일이 너무도 즐거운 스님이다.

어릴 적, 걸어서 어딘가르 ㄹ다녀와야 하는 엄마의 심부름이라면 한번도 거역해 본 일이 없는 소년은 이제 고희를 넘기고도

영축산을, 통도사를 걷고 또 걷는다. 어떤 양념도 끼어들지 않는 걷기수행이다. 그저 걸을 뿐이다. 담백하게 걸을 뿐이다. 좋고 나쁨마저

내려놓는 걸음, 그 모습에서 무상무념의 수행지적 고요가 흐른다. 담마와 같은 충일함이 넘쳐나는 포행길에서 스님을 만났다.

 

요즘관느 너무도 판이 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던지라 당시엔 행자들이 차고 넘치던 시절이었다. 나의 속가 부모님은 비단가게를 운영하고 계셨다.

독실한 크리스턴이던 엄마는 집에 들른 스님들에게는 언제나 밥을 해서 먹여보내는가 하면, 배를 떨구어 잠자리가 막막한 이들에게는

이부자리를 내놓으며 편안하게 쉬고 갈 것까지를 세심하게 챙기는 분이셨다.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마음 씀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거문도에

사는 스님과 우연찮은 이연을 맺게 되었고 고교를 졸업한 나는 목회자가 아닌 출가사문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러나 약관 스무살을 넘긴나에게 조계종단이 아닌 타 종단에서의 수도는 심한 갈증만을 증폭시켰다.그리하여 난 간절하게 공부 할 기회를 찾았다.

 

내 출가는 공부인으로서의 수행이었기에 난 공부가 하기 좋은 도량이라는 소문을 듣고 통도사를 찾아왔다. 비록 조계종의 승려는 아니었으나 ㅜㅊㄹ가인으로 살다왔기에 통도사 입문후 열흘만에 행장반장을 맡게 되었다. 그럼에도 여덟 달에 걸틴 행자생활은 공부를 할수 있다는 일념으로 힘들다는 생각 한 번 해본적이 없었다. 항조스님, 혜철스님등과 행자생활을 하며 통도사를 익히고 사문으로서의 생각의 키를 높이는 일로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경봉큰스님, 월하 튼스님, 일암스님, 경하스님 등 정말이지 영축산을 호령할 듯한 어른스님들이 신장처럼 옹호해주던 1970년대 통도사는 최고의 수행도량이었다.

그렇듯 걸출한 스님들 사이에 유독 꼿꼿해 보이던 한 스님이 계셨으니 그 법호도 유명한 벽안 노스님이셨다.

'저 스님이라면 내 공부의 갈등을 재대로 일러주실 분이시겠다.'는 직감으로 나는 벽안스님께 은사가 돼 달라 청을 했다. 그러나 스님은 당신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다른

스님께 가보라며 거절을 하셨다.

그래도 은사를 정하고 상좌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내 굳은 의지를 꺾이지 않았다. 소싯적부터 몸이 아주 약했던 나는 행자생활 도중 몸이 아파 병원 신세 지는 일이 많았다. 그날도 몸이 아파 신평의 병원에 갔다오니. 벽안스님께서 "박행자는 어딜갔느냐"며 나를 찾으셨다는 말을 한 도반이 얼러주었다. 내치지 않으셨다는

안도감으로 다시 용기르 ㄹ내서 말씀을 드렸다. "스님, 저를 상좌로 받아주신다는 겁니까!"라고.

그러나 다시 또 고사하시는 거였다.

 

호남 땅에서 공부를 위해 영남 땅가지 왔는데 은사를 찾는 일이 그렇게 녹록하랴 싶은 마음으로 여일하게 임했다.

결국 수계를 받기 전날, 벽안스님은 벽장에다 올려둔 낡디 낡은 장삼을 꺼내놓으셨고 플라스틱 재질의 발우를 내 몫으로 내 놓으시는 거였다.

그 장면을 목격한 채공보살이 결국 한마디 불쑥 내뱉었다. "스님, 수계를 받는 행자에게 어찌 그렇게 낡은 장삼을 주십니까. 박행자가 얼마나 착실하게 행자로서의 도리를 잘하는 행자인데요...." 라며 볼멘 소리로 내 역성을 들었다.

이윽고 수계식날, 원래대로라면 노천당 월하스님께서 수계를 해 주시는데, 노천 방장스님의 출타로 그날은 벽안스니이 대신 곌르 설하시는 거였다.

많은 행자들 이름이 불리는데 내이름은 끝나갈 무렵까지 호명되지 않았다.가슴을 쓰어내리는 마지막 순간 스님은 가장 호기있게 호명을 하시는 거였다.

"박행자, 법선, 내 상좌!"라고.

금강계단에서의 그 호명은 마치 영축산에 내 골수를 새기는 일처럼 분명했고 세상을 다 얻은 양 의기 양양했다.

옷깃이 낡아 다 헤진 장삼도,플라스틱 발우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수계를 받아 지닌다는 한 생각 분이었고, 은사가 벽안스님이라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뻤다.

 

꼿꼿한 냉기를 춤어내시되 한 없이 따뜻한 온화함을 지닌 촌철살인의 벽안스님이 나의 은사였던 것이다.

얼마의 신가이 지나 뼈가 심한 통증을 느끼던 스님을 위해 인분을 황금수라 일컬으며 걸러드린 일과 변이 나오지 않아 맨손으로 변을 빼드린 기억은 실로 밀밀한 은사와

상좌로 의기투합하는 금쪽같은 시간을 부여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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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이제 은사스님을 처음 모시던 때와 같거늘 수행이, 삶이 은사스님에 턱없이 못미쳐 송구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누가 물었다. "훗날, 다시 오게 된다면 그때로 깎은 모습이고 싶으십니까"라고.

"모습은 이모습이되 생각은 다른 생각인 나로 다시 오고 싶습니다."내가 들려준 답이다.

마지막 몸 바꾸던 순간, 내 품에 안겨 세연을 다하신 스님이 오늘 너무도 그립다. 더불어 속가 7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나를 출가자로 보내놓고

까치발로 기다리던 내 어머니는 승속을 가리지 않고, 더는 비구, 비구니를 가리지 않고 여비를 쥐어주며 보내드리곤 했으니 당신 사신 경계없는 넉넉함이 나를 수행자로 살개 해 주신 뿌리였음을 표표히 밝히며 놓는 연습에 드는 오늘이다. 내 노정은 영원한 행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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