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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불교신문] 재약산 표충사와 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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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44회 작성일 21-07-02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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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과 뫼] ⑱ 재약산 표충사와 암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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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와 표충사

표충사(表忠寺)는 경남 밀양 재약산(載藥山)에 자리한 통도사 말사로 임진왜란에 출정했던 승장 사명당을 기리는 호국도량이다.


표충사는 신라 원효대사가 창건한 죽림사(竹林寺)가 기원이다. 절 주변에 대나무가 많아서 붙인 이름이다. 829년(흥덕왕4년) 황면(黃面)선사가 중건하여 영정사(靈井寺)로 이름을 바꿨다. 황면은 인도 출신으로 짐작한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갖고 들어와 사리를 봉안할 삼층석탑을 세우고 절을 중창했다. 나병에 걸린 흥덕왕 셋째 아들을 치유하기 위해 약수를 찾아 다녔는데 죽림사 약수를 먹고 완쾌돼 왕이 기뻐하며 가람을 중창케 하고 절 이름도 바꾸었다고 한다. 대나무 숲, 삼층석탑, 영험하다는 샘 모두 표충사를 가면 만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절이 크게 일어난 것은 조선말 사명대사를 모시면서다. 임란 승장(僧將) 사명대사는 이 지역 무안 출신이다. 대사는 스승 서산대사를 모시고 승병을 일으켜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혈혈단신 일본으로 들어가 법력으로 감화시켜 3천명의 조선 포로를 환국시킨 조선의 영웅이다. ‘구국의 영웅’이자 선교를 겸비한 선지식이며 유학에도 달통했으니 불(佛) 관(官) 민(民)이 모두 자랑스럽게 여기고 추앙했다.


승병을 일으켜 전장을 누비고 왜군을 이 땅에서 몰아 낸 대사는 조용히 수행에 전념코자 했다. 자장 율사가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진신사리를 모신 영축산 자락, 의상대사가 창건한 작은 암자 백하암(白霞庵)으로 갔다. 그러나 조선에는 대사 외에는 전후 처리를 담당할 인물이 한 명도 없었다. 수많은 권세가와 유자(儒者)가 있었지만 적진을 찾아가 전후 처리를 교섭할 담력과 실력 인품을 겸비한 위인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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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악산으로 명기한 일주문


스승의 입적 소식을 듣고 묘향산 보현사로 가던 대사는 급히 조정의 부름을 받고 대마도를 거쳐 적진 본거지 에도로 건너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 강화 교섭을 벌였다. 적과의 화친을 공개할 수 없었던 조정은 대사의 도일(渡日)을 비밀에 부쳤다. 모두 적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했지만 대사는 법력으로 감화시켜 기대하지도 않았던 조선 백성 3천명을 송환하는 성과를 거뒀다. 재침 불가 확약 까지 받아 일본은 그 후 300년 간 동해 바다를 건너지 않았다.

대사가 해인사 홍제암에서 입적 한 뒤 백하암에 나라에서 표충사(表忠祠)를 세우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사명대사와 스승 서산대사, 기허당 영규대사 영정을 모셨고 별도의 전각에 사명대사가 지니고 다니던 원불(願佛)을 봉안했다. 이름도 증흥사(重興寺)로 바뀌었다.


1839년 사명대사 8세손인 천유대사가 좀 더 넓고 접근이 용이한 곳으로 이전할 계획을 세워 조정의 허가를 얻어 터만 남은 영정사 자리로 이전하고 이름도 표충사로 변경했다. 삼화상을 모신 사당이 중심이다 보니 여느 절과 다르게 절 집 안에 유교문화를 들여온 셈이 됐다. 표충사는 그래서 사당과 절 영역으로 나뉜다. 천유대사가 처음 이곳에 표충사를 지을 때는 사당이 중심이었지만 사원이 철폐되고 일제시대 화재가 나 다시 중창하고 근현대를 거치면서 지금과 같은 사당과 법당이 확실하게 구분지어 졌다.


사당영역에는 서산 사명 기허대사를 모신 표충사(表忠祠)와 사명대사 유물관을 만난다. 유물관에는 사명대사 유품 300여점을 모셨는데, 선조가 대사에게 하사했다는 금란가사와 장삼, 금제 수저 패도를 비롯하여 대사가 평소 원불로 모셨다는 목조불상과 염주 등을 소장하고 있다. 대사가 전설 속 인물이 아니라 실존 했던 위인 임을 유물을 통해 느낄 수 있다.


석축 위 계단을 지나면 삼층석탑을 만난다. 황면선사가 인도에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고 와서 사리를 봉안하고 세웠다는 그 탑이다. 삼층석탑 왼편은 효봉스님이 주석하다 입적한 유서 깊은 전각 서래각이 보인다. 오른편은 종무소와 스님들 요사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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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층폭포


           흥덕왕 아들의 병을 낫게 했다는 영험한 영정약수를 지나 계단 위 부터는 대광전 관음전 명부전 등이 있는 법당이다. 정면에 있어야할 대광전이 옆으로 비켜 나 있어 어색해 보이는데 원래 진입로가 남향인 대광전 앞의 남계천 위에 서 있는 우화루(雨花樓)였다.



서래각 뒤편 내원암 가는 길에 효봉스님 부도와 비가 나온다. 자연석 위에 바위에 새긴 웅장한 부도탑이다. 대부분 부도가 석종형인데 반해 보기 드물게 자연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태풍이 몰아쳤을 때 부임한 주지 진각스님은 표충사 전각을 보수하고 호국도량으로 제자리를 찾는데 정진 중이다. 총무원장을 역임한 자승스님과 함께 한겨울 동안거 3개월을 천막법당에서 난 수좌 진각스님은 죽비를 잠시 내려놓고 호국 도량 표충사를 재건하고 호국의 정신을 잇는 소임을 어깨에 짊어졌다.

 

표충사 일주문의 비구니 암자


재약산 표충사 산내 암자는 7곳이다. 표충사 일주문과 나란히 창건 1세기 가량 역사를 지닌 비구니 사찰 대원암이 있다. 표충사 뒤편 재약산 정상 수미봉 아래 진불암(眞佛庵)이 암자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해산스님의 전설 같은 수행담이 전해오는 내원암, 단청장 혜각스님과 불모 석정스님이 6년 묵언정진했던 한계암, 독립운동 산실 서상암이다. 청하암 적조암도 만난다.


표충사 우화루 옆으로 흐르는 남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사자평 가는 길이다. 아름다운 폭포를 만나는 편안하고 즐거운 길이다.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청하암(淸河庵)이라는 작은 암자가 나타난다. 6년된 신생 암자다. 임도를 따라 가다 다리를 지나자 본격적으로 등산로가 펼쳐졌다. 옆으로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졌고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흑룡폭포를 지나고 다시 2km 가량을 더 올라가자 재약산의 명물이자 얼굴인 층층폭포가 나왔다. 우리나라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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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암


재약산과 그 옆 천황산(天皇山)은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다. 기암괴석 같은 암벽이 있는가하면, 정상에는 억새가 우거진 넓은 들이 펼쳐진다. 그 유명한 사자평(獅子坪)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산지습지다. 2006년 환경부가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한 소중한 자연이다. 높은 산중에 이처럼 넓은 벌판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바위 사이로 난 수로 같은 물길과 넓은 습지를 이용해 화전민들이 농사를 지었다. 1966년 개교한 고사리분교가 1990년대 까지 존속했었다.


사자평은 불교 성지다.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승군을 훈련시켰으며, 곳곳에 암자의 자취가 남아있다. 표충사 소유로 불교 성지였지만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어려운 이들이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형편이 나아지며 등산객이 몰려들자 술과 음식을 팔았다. 수행환경 자연환경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표충사 입구도 난전으로 어지러웠다.


당시 통도사 주지 원명스님과 표충사 주지 목산스님이 주민들을 설득하고 이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표충사에서 한 참 떨어진 곳에 별도로 구역을 정해 관광지를 조성했다. 사자평 60만평을 불법 점거 하던 화전민들도 함께 이전토록 하고 표충사 명의로 등기를 완료했다.


사자평에 연등이 휘날렸다. 층층폭포에서부터 불던 비바람이 산 정상에 오르자 더 거세졌다. 진불암(眞佛庵) 가는 길은 듣던 것과 달리 평탄했다. 임도가 끝나자 산길 아래로 내려갔다. 진불암이 나타나기 전 바위가 앞으로 돌출해 있고 그 위에 서자 표충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비 안개가 아니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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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불암에서 바라본 표충사와 일원

해산스님 견성했던 진불암


계단을 내려서자 단단한 자갈과 시멘트로 지은 건물 두채가 보인다. 진불암이다. 도봉산 무문관을 보는 듯 하다. 거친 자연환경을 감안해서 이처럼 튼튼하게 지은 듯 하다. 법당과 요사채 두 동이 나란히 서 있고 그 가운데 샘이 솟아났다. 샘터 앞에 작은 돌 비석이 하나 서있다. 해산스님 오도송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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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불암 전경

진불암에는 과거부터 납자들이 토굴에서 한철씩 생식을 하며 도를 닦은 유서 깊은 수행처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 해산스님이다. 스님의 수행과 일화는 산 중 곳곳에 남아 전한다. 스님은 진불암에서 정진할 때 하루 쌀 한 숟가락을 물에 불려서 먹고 일주일 동안 변도 보지 않고 앉아있었다고 한다.


스님의 속명(俗名)은 정경출(庚出), 법명은 수진(守眞), 당호(堂號)가 해산(海山)이다. 1910년 청도에서 태어난 스님은 유학과 한문을 배우고 밀양으로 이사한 뒤 표충사로 차를 배달하는 일을 하다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어 1926년 17세에 내원사를 처음 보고 “여기가 바로 내가 살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청도 운문사 사리암으로 입산했다가 내원암에서 박담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34년 늦가을 가행정진을 결심하여 동상암(東上庵, 진불암眞佛庵)에 올라한 철을 났다.


동상암 옆 표충사가 내려 보이는 벼랑 끝에 앉아 죽을 각오를 하며 밤낮으로 정진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골짜기 전체가 훤하게 밝고 한겨울에 솥에 곰팡이가 피는 경험을 했다. 바로 걸망을 메고 표충사로 내려가 객실에 머무는데 대중이 “해산이 견성한 것 같다”며 웅성거리더니 저녁 예불 뒤 법상으로 모셔 상당법문을 청했다.


제망라포무비수(帝網羅捕無鼻獸), 능장활각유제아(能將虫舌角誘啼兒),금모사자반거지(金毛獅子半踞地), 기고만장범난등(氣高萬丈凡難登) “하늘 덮는 그물을 쳐서 코 없는 짐승을 잡고, 능히 달팽이 뿔로 우는 아이를 달래는데, 금털 사자가 웅크리고 앉았으니,기세가 당당하여 모두가 오르기 어렵도다.”
그 때 나이 25세였다. 진불암 ‘해산바위’에는 이 오도송을 한글로 풀어 적어 놓았다.


이후 혜산스님은 정혜사를 찾아가 만공스님을 친견하고 치열한 법거량 끝에 인가를 받았으며 만공스님은 ‘해산본래겁무연(海山本來劫外然)’, 바다와 산(해산)은 본래 겁 밖이로구나는 구절이 담긴 전법게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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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암

내원암에는 해산스님 부도와 비가


운수납자가 되어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오대산 속리산 등지로 행각을 하고 마하연에서 3년 결사를 하였으며 송광사에서는 강사를 했다. 1948년 만 38세에 통도사에서 조실로 추대돼 6년간 조실을 맡았다. 1954년부터 12년 간 부산 아미동 광성사에서 만행의 시간을 갖다가 1966년 지리산 정각사(正覺寺) 수월선원(水月禪院) 조실로 추대되었으며 1967년 윤월하스님 의 추천에 의해 통도사 보광선원 조실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표충사로 돌아온다. 7년간 표충사에서 주지와 조실을 맡다 1974년 축발 암자 내원암으로 돌아와 해동제일선원(海東第一禪院)이라는 이름으로 선원을 개원했다.


내원암에서 6년을 정진하며 후학을 기르고 부산 밀양 등 재가자들에게 깊은 감명과 함께 수많은 가르침을 전했던 스님은 1980년 12월 22일 (음력) 부산 광성사에서 세수 71세, 법랍 55세로 입적(入寂)했다.


표충사 주지 진각스님에 따르면 진불암에는 경봉스님이 직접 조성해서 모신 나반존자상이 있었다. 경봉스님은 운문사 사리암, 극락암 단하각과 이곳 진불암 등 세 곳에 나반존자상을 조성해 봉안했는데, 진불암이 높은 산중에 위치한 때문인 지 언젠가 도단 당했다. 경봉스님이 조성한 나반존자상은 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이어서 도둑이 쉽게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진불암에서 직선으로 내려서면 내원암이다. 내원암 입구에 해산스님 부도와 스님의 행장을 기록한 비가 서있다. 내원암 뒤를 돌아가면 작은 암자가 또 나온다. 명장대(明場臺)다. 작고 아담하면서 예쁜 암자다. 중앙종회의원, 월정사 삼화사 주지 등을 역임한 종단 중진 효림스님이 몇 해 전부터 이 곳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재약산은 효림스님이 처음 출가했던 곳이라고 한다. 명장대를 지었던 자허성관스님이 새 절을 지어 옮겨간 곳이 청하암이다.


내원암에서 천황산 방향으로 들어서면 사자평 방향과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바위로 된 큰 어항처럼 길게 드리운 계곡 위로 맑고 찬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닮았다. 그래서 이름이 금강동(金剛洞)이다. 금강동에 두 암자가 있으니 하나는 한계암(寒溪庵)이고 다른 한 곳은 서상암(西上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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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암에 주석하는 동하스님

혜각 석정 수안스님 6년 정진 한계암


차가운 계곡(寒溪)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암자 옆으로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암자는 두 스님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한계암은 원래 비비정(飛飛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고승대덕이 수행정진하던 터라고 전한다. 방치돼 있던 것을 1966년 가을 석정스님이 표충사 주지로 있을 때 평소 보아뒀던 터에 토굴을 지었다. 건축자재는 외부에서 구입했고 비용은 제자 수안스님과 함께 일년 간 불사해서 모은 돈에다 혜각스님 광덕스님이 보탰다. 스님은 이듬해 3월 표충사 주지를 내놓고 한계암에 입주했다. 혜각스님 석정스님 수안스님이 부처님 처럼 6년 간 “쌀이 떨어져 굶어죽게 돼도 좋다. 공부하다 죽자는 비장한 마음으로 용맹정진에 들어갔다”고 정진했다.


스님은 한계암에서 ‘참선하면서 공부와 병행할 수 있는 그림이 무엇일까?’를 궁리하다가 묵화(墨畵) 밖에 없다고 생각해 원상(圓相)을 그리게 됐으며 이후 달마, 한산습득, 심우도 등을 그렸다고 전한다.


한계암 이름과 그 주변 금강폭포 금강동 이름은 모두 혜각스님과 석정스님이 수행하던 금강산과 닮았다 해서 붙였다. 혜각스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48호 단청장이며 석정스님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불화장(佛畵匠)이다. 혜각스님이 입적하자 석정스님이 비문을 지었다.


대나무로 엮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군불을 때는 노스님이 연기를 맞으며 앉아있다. 동하스님이다. 혜각스님 상좌다. 한계암이라는 이름은 금강폭포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얼음처럼 차가워 은사 혜각스님이 지었다고 들려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군불을 때 밥을 짓는, 문명의 이기를 전혀 입지 않는 토굴이다.

 

금강산과 닮은 천황산 계곡


한계암에서 70미터 가량 위 너들지대 한 가운데 자리한 서상암은 문이 잠겨 있다. ‘출입금지’라고 붉은 글씨로 쓴 경고문에 숲 사이로 얼핏 보이는 암자만 들여다 볼 수 밖에 없었다.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건너가 이곳 저곳 다니며 사진을 찍어 올리는 등산객들 때문에 토굴에서 정진하는 수좌들이 더 문을 걸어 잠그는 지 모른다. 동하스님에 따르면 진불암과 서상암을 각각 동상암(東庵),서상암 이라고 했다. 줄여서 동암 서암이다. 그만큼 오래된 암자다.


재악산 산명 복원운동을 펼치는 밀양 향토사학자와 유지들에 따르면 서상암은 일제시대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던 독립운동 성지다. 정평공 후손들이 일제시대 서상암에 비밀 아지트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벌여 서상암에서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여 군자금을 만주와 상해에 까지 보내고, 정보활동, 무장투쟁을 전개했다고 전한다. 현재 서상암에도 한계암처럼 혜각스님 손시봉이 주석하며 정진한다.


표충사 산내 암자는 15곳에 이를 정도로 곳곳에서 수좌들이 정진했다. 바위가 많아 터를 잡기가 쉽지 않지만 진리를 깨쳐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일념으로 목숨을 걸었던 수좌들에게는 악조건은 아무런 장애가 아니었다. 재약산 표충사를 가면 그들의 이야기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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